온주밀감, 한라봉(데코뽕또는 시라누히)레드향(칸페이), 천혜향(세토카), 포멜로,그레프프루츠, 금귤(금감,킹캉, 낑깡), 향모초(카보스), 청견(키요미),이쵸칸, 병감(폰칸), 유자(감귤류과), 등자,초귤(스다치), 휴가나쓰 등 아마도 처음 들어본 감귤 이름들이 다소 있을 것이다.
사실 제주박물관에 성인들이 입장해 무관심에 대충보고 나가려는 찰라, 꼬마 관람객들의 함성 “우와 신기해”란 소음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주변에는 감귤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설치되어있고, 하나하나가 포토존이다. 어른들은 무흥미로 지나치고 아이들의 눈망울이 또릿또릿해진다.
1448년 봄, 휴식을 위해 정자 희우정을 방문한 임금 세종과 집현전 문인들 그리고 동행한 문종은 신하들에게 한접시의 진귀한 과일을 하사한다. 과일이 모두 없어지자 모습을 드러낸 문종의 짧은 시, “향나무는 코에만 향긋하고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맛있네, 동정귤을 가장 사랑하나니 코에도 향긋하고 입에도 달기 때문이지”란 시를 읊었다한다. 귤나무를 순찰하는 “탐라순력도” 흔히 병풍에 그려진 옛 화첩같은 채색화이다.
조선 숙종때인 1702년에 병와 이형상이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에 부임하여 제주도내 각고을을 순력하면서 당시 거행했던 여러 행사장면과 자연, 역사 산물, 풍속 등을 화공 김남길이 그린 그림이다. 여기서 우리는 귤의 역사라고 짐작한다. 먹을 줄만 알았지 어떤 역사를 가진 의문은 아마 없는듯하다.
귤의 진상은 9월부터 시작하여 매 10일 간격으로 1운에서 20운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다. 1526년(중종21)에 이수동 목사는 별방, 수산, 서귀, 동해, 명월방호소에 과원을 설치하고, 그곳을 수비하는 군인으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후 과원은 제주목에 22개, 정의현에 7개, 대정현에 6개로 증설되었으며, 숙종시에는 모두 42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과원에서 생산되는 양으로써, 봉진의 수량을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관에서는 일반 민가에 있는 귤나무를 일일이 조사하여 관리하였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귤나무 8주를 기준으로 하여 1년의 역을 면제하여주는 방안이 마련되기도 했지만, 귤이 열매를 맺으면 관가에서 일일이 그맺은 바를 헤아리고 장부에 기록하였다가 그 수를 귤나무 소유자에게 모두 부과시켰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파생하였다.
즉, 수확시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남아있어 그 간에 해충 또는 바람 등에 의해 떨어진 귤마져 그 소유자에게 전가시켰던 것이다. 이에 민가에서는 오히려 귤나무가 고통을 주는 나무라하여 도리어 귤나무에 더운물을 끼얹어 고사시키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망경루 앞 뜰에서 귤을 상자에 넣어 봉하는 과정등이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당시 봉진한 수량은 당금귤 687개, 감자 25,842개, 금귤 900개, 유감 2,644개, 동정귤 2,804개, 산귤 828개, 청귤 876개, 유자 1,460개, 당유자 4,010개, 치자 112근, 진피 48근, 청피 30근 등이다. 한편 제주의 귤이 조정에 도착하면 임금은 성균관유생들에게 그 일부를 나누어 주면서 과거가 시행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황감제라는 과거시험이다.
원래 감귤류의 원생지는 동부 아라비아로부터 동쪽으로 필리핀까지, 히말리아산맥으로부터 남쪽으로 인도네시아 또는 호주까지 포함하는 아시아 동남부라고 믿는다, 이넓은 지역중에서도 인도동북부와미얀마 북부를 중심으로 믿어왔는데, 최근의 증거에 의하면 중국의 중남부에 위치한 운남성이 감귤의 생성과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앗삼으로부터 미얀마 북부를 거쳐서 운남성에 이르는 상록활엽수림대는 감귤류의 생육에는 좋은조건으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