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성한다. 게을렀던 날들을. ]
1월 다이어리가 휑하다. 드문 드문 ‘주간 회의’, ‘칼럼 제출’, ‘병원 예약’ 같은 무미무취의 힘 없는 글자들만 보일 뿐, 휑하다. 야심 찬 희망으로 장만했던 새빨간 다이어리가 새삼 낯부끄러워 지는 순간이다.
‘도대체 어떻게 지냈지?’ 하는 마음에 어제, 엊그제, 일주일 전 하루 일과를 떠올려보았다. 소름이 끼치도록 똑같은 데칼코마니의 나날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기상 – 출근 – 근무(회의, 보고와 같은 근무 내용이 주요 일과) – 퇴근 – 운동 – 취침 – 다시 기상과 함께 반복. 그렇다. 나는 옷만 바꿔 입는 같은 하루에 무한 도돌이표를 찍고 있다.
스스로를 냉정하게 진단해보건데, 요즘 나는 ‘쉬어가기’, ‘느림의 미학’ 이라는 예쁜 말로는 포장하기 어려운 ‘게으름’ 병에 걸린 것 같다. 무엇을 근거로?
굿바이 게으름(2007) 의 저자 문요한씨는 ‘게으름’ 을 ‘위장의 천재’라 비유하며, 사람들은 이따금 자기합리화 과정을 통해 게으름을 게으름이 아닌 것으로 자기합리화 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예를 들면, 시험 공부가 하기 싫어 열심히 방 청소를 하는 학생은 그렇지 않은 척 위장하고 있지만 실은 해야 할 과업을 계속 미루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는 지의 척도가 되는 ‘운동량(momentum)’이 아인 삶에 대한 의지, 태도와 같은 심리적 척도 ‘능동성(activity)’ 이 게으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또, 게으른 사람의 특징 중 하나로 선택 장애를 꼽았는데 게으른 사람들은 선택의 가짓수를 너무 넓히거나 좁히는 식으로 선택을 회피하고 변화를 지양한다 지적했다. 이 부분에서 상당히 뜨끔했는데 마치 조만간 시간 나면 보자던 친구를 떠올리면서도 운동을 갈 지, 집에서 쉴 지, 남은 업무를 처리할 지를 동시에 고민하고 결국 매번 운동을 가는 내 모습을 꼬집는 것 같았다. 아이러니지만 쳇바퀴처럼 도는 지금 일상이 지루하다 느끼면서도 일상에 안주함으로써 편안함을 느끼는.
그러니 요모조모 따져봐도 나는 요즘 ‘게으름’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명쾌한 진단을 내리고 나니, 그간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꽁꽁 숨겨놓고 미뤄 온 일들이 보이는 것 같다. 해서 오늘부터 일주일 간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슬그머니 적어 보았다.
1. 겨울 옷 정리와 세탁소에 묵혀둔 옷 찾아오기
2. 지지난 달부터 조만간 보자던 친구들과의 회포
3. 지인들에게 보내는 새해 안부 인사
4. 잃어버리고 만들지 않은 신용카드 재발급
5. 아파도 꾹 참고 받지 않았던 디스크 치료
6. …..
족히 20개는 넘는 목록을 보며, 어떻게 이렇게 지냈지 하는 자책감과 전부 해치워 버렸을 때 예상되는 성급한 쾌감이 동시에 든다.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 오늘은 훈훈한 바람과 함께 다가오는 봄이 실감나는 날. 게으른 날들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