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4년(1653년) 화란(네델란드)의 무역선 스페로호크(sparrow hawk)호가 심한 풍랑을 만나 난파되어 64명의 선원중 36명만 살아 제주도 산방산 앞바다 지금의 용머리 해안에 상륙한다. 제주에 상륙한 그들은 모두 체포되어 13년 28일동안 억류되고 8명은 탈출 귀국한다. 그중 하멜이 한국 억류생활을 기록한 책이 표류기이다. 내용은 인식 차이로 잘못 인식한 내용도 다수 전한다,
하멜이 출발한 시기는 1653년 1월10일 네델란드를 떠난 포겔스트루이스호는 6월1일 자바섬의 바다비아에 도착했다. 그곳에 몇일 머물렀고, 다시 네델란드 동인도회사의 총독 명령에 따라 스페로 호크호로 대만의 안 핑으로 향발 6월14일 도착, 이들의 임무는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는 네델란드인 라세르를 임지로 데려다주는 일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다시 일본나가사키로 향하라는 명령하에 출항하지만 8월11일 대마 해협의 풍랑으로 빠져나오지못했다.
그해 8월15일 풍랑은 더욱 심해져 선미의 관망대가 떨어져버렸고, 탈출용 작은 배도 잃어버렸다. 배안에 물이 차올라 모든 짐을 버리고 살길만 찾는데 순간 한 선원의 목소리 육지가 보인다란 말이다, 바로 제주도 남해안지금의 용머리 해안이었다. 정박도중 심한 바람으로 결국 난파되었고,선원 28명은 익사 36명은 육지에 오르자 체포 서울로 호송되었다. 서울에 2년 억류후 1656년 전라도로 옮겨진다.
그동안 14명이 죽고 1663년 22명은 여수, 남원, 순천으로 분산 수용되었다. 이들은 잡역으로 길고긴 고난의 억류생활을 했다. 먼저 1628년(인조6)에 표류한 동족 네델란드인 벨테브레이를 만난다. 동포를 만난 것도 잠시 고통 생활은 계속된다. 하멜은 전라좌수영에서 억류생활을 했으며, 배 한척을 마련 부근 섬들을 내왕하면서 조수간만의 차와 풍랑, 풍향 등을 숙지하게 되었다.
16명중 8명만 1666년(현종7) 9월4일 야음을 틈타 탈출에 성공 일본나가사키를 경유해 1668년 7월 암스테르담에 귀환했다. 탈출에 가담하지 않았던 나머지 생존자 8명도 2년후 조선정부의 인도적인 배려로 석방, 네델란드로 돌아갔다.
1980년 10월12일 한국과 네델란드 양국은 우호증진을 위해 각각 1만달러씩을 출연해 난파상륙 지점으로 추정되는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해안언덕에 높이4m, 너비6.6m의 하멜기념비를 세웠다.
하멜은 거의 14년 동안 군역, 감금, 태형, 유형, 구걸 등의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하였고, 남쪽과 북쪽 지역을 끌려다니다 보니 풍물과 풍속에 대한 사정을 관찰할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대한 깊은 인상과 풍부한 경험을 잘 살려 기록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이해가 조금 부족한 탓에 서양사회에 조선을 알리는 내용이 조금 부족한 면도 있다. 조선을 알리는 최초의 저서로서는 사료적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 화란의 하멜책은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서양의 많은나라들이 번역을 하여 간행함으로 조선이란 나라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하멜상선 전시관의 1층에는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한 네델란드 출신 감독인 히동구(히딩크)의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2층은 제주도표착 조선에서의 생활모형을 그래픽으로 재현했고, 3층은 유럽상선의 구조가 원형대로 재현되어 있어 17세기 유럽 범선의 모습을 엿볼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