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은 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석기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 주거지에서 생활하였으며, 유물로는 타제석기와 골각기 등이 발견되었고, 청동기, 철기시대 유물 유적으로 고인돌, 마제석기, 토기, 옹관묘 등이 제주도내 전역에 분포되어있다.
제주의 명칭은 도이, 동영주, 섭라, 탐모라, 탁라 등으로 불려왔으며, 이명칭중 “동영주”만을 제외하고 모두 섬나라 라는 뜻이다.
그리고 개벽신화인 3성 신화에 의하면 태고에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라고 하는 삼신인이 한라산 북쪽 모흥혈(현재 삼성혈)이라는 땅 속에서 솟아나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이들 삼신인들은 “벽랑국”에서 오곡의 씨앗과, 송아지, 망아지 등을 갖고 목함을 타고, 제주도 동쪽해상으로 들어온 삼공주를 맞아 혼례를 올렸다.
그후 “고을나”의 15대 후손 3형제(후, 청, 계)가 당시 한국의 고대왕조의 하나인 “신라”(B.C57~A.D935)에 입조하여 “탐라” 라는 국호를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탐라’는 신라를 섬기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탐라국은 고구려, 백제 및 신라로 분열된 삼국시대에는 이들 나라들과 독자적으로 혹은 그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고려시대에 들어 AD938년 탐라국 태자 고말로가 고려에 입조한 후 고려 충열왕 시대(AD 1275년)에 다시 탐라국으로 회복하였으나 다시 AD 1294년 고려로 환속되었다. 지금의 제주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고종때로 알려지고 있으며 고려로 환속되면서 다시 제주로 명명되었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제주목에 목사를 두어 다스렸고, 1864년 고종 2년에 제주목에 정의현과 대정현을 두었으며,1906년 광무 10년에 목사를 폐지하고 현을 군으로 하여 군수를 두었다.
광복이후 미군정 시절인 1946년 8월 1일 제주도로 승격후 2007년 7월 제주특별자치도로 개편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주도는 동서로 약 73KM, 남북으로 31KM인 타원형 모양의 화산섬으로, 섬 중심부에 높이1,950M 의 한라산이 우뚝 솟아 있고,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제주도는 섬 전체가“화산박물관”이라 할 만큼 다양하고 독특한 화산 지형을 자랑한다.
땅위에는 크고 작은 368개 오름(오름:소규모 화산체를 뜻함)이 펼쳐져 있고, 땅 아래에는 160여개의 용암동굴이 섬 전역에 흩어져 있는데, 작은섬 하나에 이렇게 많은 오름과 동굴이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이러한 제주의 가치는 2002년 생물권보전지역 지정을 시작으로 2007년 세계자연유산 등재, 2010년 세계지질공원 인증까지UNESCO 3관왕을 달성한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으로, 제주가 전 세계인이 함께 가꾸고 보전해야할 “환경자산의 보물섬”으로 도약한 것이다.
스위스 영화제작자겸 박물관 큐레이터인 베르나르드 웨버가 창설한 뉴세븐 원더스 재단에 의하여 2011년 11월 12일 세계7대 자연경관 제주도가선정, 베트남 하롱베이, 필리핀 지하강, 브라질 아마존, 아르헨티나이과수폭포, 인도네시아 코모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테이블산이 선정된 나라들이다.
그러나 이곳 제주도관광지에도 행복한 사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슴아픈 사연의 제주도는 “제주4.3 사건”이 가슴을 아프게한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제주4.3사태(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948년4월 3일 제헌의원 선거를 위한 5. 10 총선거를 반대하는 남로당 무장대의 관공서 기습에서부터 시작된 제주4.3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남로당 무장대 주도자들이 마지막으로 진압될 때까지 남로당 무장대 및 이를 토벌하기 위한 토벌대(군 및 경찰, 서북청년단 등) 양측에 의하여 무고한 양민들이 수없이 학살되었다.
사건의 결말은 이데올로기 사건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죽은자는 말이없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웃고 떠들고 다니지만 그 사건을 입에 담는 사람은 그저 관광지의 한 코스에 불과하다. 날로 발전하는 제주도의 관광지는 다만 살아있는 사람들의 즐거움과 행복한 웃음을 자아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