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기 좋은 날]
낯간지러운 건 싫다. 파스락 거릴 만큼 담담한, 그렇지만 묵직하게 솔직한 말이 좋다. 오랜 연애 기간 동안 들었던 수 많은 고백과 토하듯 뱉어내는 마음보다 성급한 말들. 그 중 매년 봄과 초여름까지 문득문득 생각나는 그 말. 사실은 그 사람 숨결 하나 느낄 수 없었던, 말도 아닌, 짤막한 안부를 묻는 글이었던 그 말.
“가끔 여름 밤 길을 같이 걷고 싶더라.”
나랑 걷고 싶다는 그 사람은, 이제 나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런데도 계속 생각나는 이 말 때문에 한 동안 꽤 많이 아팠더랬다. 꽤. 많이. 순전히 같이 걷자던 그 말 때문에.
조금 올드한 표현이긴 하지만 인생의 동반자, 동행을 찾는다는 말은 말 그대로 “같이 길은 가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런데 길을 같이 걷는다는 건 사실 웬만큼 친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서로의 보폭, 그에 맞는 사뿐사뿐한 호흡, 들숨 날숨이 맞아야 하고, 상대의 생각을 읽고 방해하지 않을 수 있는 배려심, 길의 마디마다 맞이하는 침묵의 공간이 편안할 만큼의 신뢰와 친밀함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수룩한 동행이 있는 산책보다는 차라리 혼자 하는 산책이 낫다. 이제 막 보들보들해진 물기를 머금은 흙 냄새와 싸한 풀냄새가 섞인 그 여름 밤의 공기를 맞으며 함께 산책하고 싶다던 그 사람과 나는 서로에게 완벽에 가까운 동행이었다.
그러다 나는 어느 순간 동행을 잃었고 한동안은 차가운 커피나 생수통을 들고 이어폰에 의지하며 혼자 산책을 했으며, 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엔 새로운 길을 탐색하며 새로운 누군가와 함께 산책하기 시작했다. 서로를 배우고, 이해하고, 맞춰가며.
아침 출근 길 노랗게 핀 산수유와 개나리를 보며, 이제 한강변을 좀 걸을 만하겠구나, 예쁜 운동화를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불현듯 떠오른 추억에 즐겁다. 같이 걷는 법, 산책하는 즐거움을 알려준 그 사람도 오늘예쁘고반듯한길을좋은동행과함께걷고있길바란다.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