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공주와 결혼한 김수로왕
김수로왕은 박혁거세, 주몽의 신화와 비슷하면서 약간 틀리다. 주몽과 박혁거세는 ‘알’이 1개였다면, 김수로왕은 6개의 알이 한꺼번에 탄생했다. 그 중에서 맨 처음 깨어난 알이 김수로왕이고, 나머지 5개의 알도 깨어나서 각각 5개의 작은 국가를 다스렸다. 가야국은 연맹부족의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사회(理事會)은 보통 5~6명으로 구성되고, 그중에서 이사장을 뽑는다. 김수로왕은 가야국의 이사회를 구성하고서 거기서 이사장으로 뽑인 것과 같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UN사무총장과 같은 성격이다. 각각 국가의 권한이 너무 크다보니 왕은 그 중에서 선출된 직책정도였다.
김수로는 연맹국가의 초대왕이 되면서 ‘다문화 정책’에 관심이 매우 많았다. 본인 스스로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과 결혼하면서 가야국의 번성을 펼쳤다. 결혼정책에 있어서 왕부터 국제적 감각이 있었던 이유는 가야의 독특한 해상무역 발달 때문이다. 이 당시 김해는 인도와 일본과 중국에 이르기까지 무역이 매우 발달했다.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이 김해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일본이 김해를 식민통치했다면 아주 씨족을 멸절했을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 이는 일본의 왜인들이 무역활동을 했던 것이며, 유럽과 일본과 중국의 해상무역 중심국가가 가야국인 것이다.
우리나라 김씨는 대략 500만명이다. 10명 중의 1명이 김씨 성을 가지고 있고, 본관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조(始祖)가 김수로왕이다. 6개의 알중에서 맨 처음 태어난 그 알, 김수로는 인도공주와 결혼한 다문화 가정을 이뤘고, 이후 많은 자식들을 낳았는데 2명의 아들은 ‘허’(許)씨 성을 줄 정도이니,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이런 이유로 본관이 같다.
가야는 예술과 상업이 매우 발달한 국가였으나, 초기 국가형태로 발전함에 있어서 신라에 밀리면서, 내부 분열로 인해서 국가완성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씨가 500만명이 넘는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가야국의 저력(底力)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