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박근영 칼럼니스트]=그러니까… 이 책은 멘토스, 껌, 알록달록 잡지, 잡화들로 부산스러운 멕시코 공항 어느 구석에서 우연히 들고 왔다.
끔찍한 비행 시간을 견딜만한 뭐가 없을까 어슬렁거리다 정말 재미 없어 보이는 책들 중 아무런 기대 없이 건조하게 집어 든 책. 그나마 책의 표지는 건조하다 못해 마른 듯한 느낌이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그러나 적당히 살집 있는 – 아일랜드인 임을 단박에 알 수 있는, 그런 – 여자가 노란 담벼락 앞에 표정 없이, 혼자, 꼿꼿하게 서 있는 그림. 책을 다 읽은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책은 건조한 표지가 내용의 절반 이상을 담고 있다.
보통의 내 취향이라면 왜 이런 책을 골랐는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어쨌든 한 손에 쥐고 비행기를 탔고 그대로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한참이 지난 긴 휴가 중 다시 발견했다.
참신하거나 새롭지도, 전개가 급박하지도, 엄청 달달한 로맨스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읽고 난 종합적인 느낌은 “재미 없다” 이다. 정말 정말 할 일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추천하기 어려운.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깊은 몰입감이 있었다. 아마 주인공에 상당한 감정이입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책은 아일랜드 시골 마을에 사는 아일리스(Eilis) 의 타향살이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열린 결말을 서사적 구조로 전개한다. 아주 느리게. 이런 평범한 줄거리에서 나를 그토록 감정이입 하게 한 점은 1950년대 아일랜드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미국 도시에 대한 느낌이었다. 그 낯섦. 두려움. 그리고 점차 변해가는 스스로의 모습에 대한 자각.
시대가 한참 뒤이긴 하지만 대학 시절 해외에서 홀로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그런 고독감을 아일리스를 통해 생생하게 다시 느꼈고, 그 경험은 돌아가기 싫은 시간에 대한 이상하고도 모순적인 그리움이 복합적으로 느껴지는 너무나 미묘한 경험이었다.
주인공처럼 나도 처음 타지에 도착했을 때 한참을 아팠다. 몸무게는 40kg 을 간신히 넘었고, 어느 날 밤에는 거의 사경을 헤매다가 울며 불며 돌아가고 싶다고 전화했던 기억이 난다. 여기 와주면 안되냐는 생떼와 함께. 그렇게 일주일 넘게 아프고 나자, 혼자 하는 일상에 꾸역꾸역 적응해야 했고 나와 다른 말을 쓰고 다른 음식을 먹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냉랭함, 겉도는 느낌 때문에 원래 내가 있던 곳이 말도 못하게 그리워서 하루에도 수십 통의 전화, 이메일을 보내고 받았던 것 같다.
그렇게 어느 순간이 지나자, 나만의 공간과 일상이 생기고 혼자라는 사실이 오히려 편안하기도 했던 것 같다. 누군가 다가오는 게 오히려 불편한. 아일리스가 약혼자 – 나중에는 비밀 남편이 되지만 – 토니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비교하고 했던 것도 아마 그런 불편함에서 나타난 방어적인 행동이지 않았을까 싶다.
앞서 말했듯 내용이 너무 별 것 없어서, 개인적으로 공감했던 부분 외에는 별 다른 할 얘기가 없다. 그렇지만 만약 타향에서 지내 본 사람이라면, 또는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처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외로움, 고독감, 두려움, 그리움, 독립적 인격체로 스스로를 자각하면서 느끼는 자신감의 복합적인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어봐도 좋다. 본인도 모르게 건조하지만 세밀한 문장과 감정 표현에 어느 순간 아일리스의 감정을 똑같이, 생생하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 저자 콜럼 토빈Colm Toibin은 특유의 정제된 문체와 발군의 심리 묘사로 동시대 아일랜드인들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 내는 작가. 힘을 뺀 듯 소박한 이야기 속에 가늠할 수 없는 무게를 싣는 토빈은 이 소설 속 배경이기도 한 아일랜드 웩스퍼드 주 에니스코시에서 1955년 태어났다. 열두 살 때부터 스무 살 때까지 날마다 글을 쓰며 작가적 역량을 닦은 그는 더블린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역사와 영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여행기, 논픽션, 비평, 희곡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쓰던 토빈은 1990년 첫 소설 『남쪽The South』으로 데뷔작에만 수여되는 「아이리시 타임스」문학상을, 다음 소설인 『불타는 황야The Heather Blazing』(1992)로 두 번째 작품을 대상으로 주는 앙코르 상을 받으며 데뷔 초기부터 탄탄한 입지를 다졌다. 이후 에니스코시를 배경으로 쓴 소설 『블랙워터 등대선The Blackwater Lightship』(1999), 헨리 제임스에 관한 소설 『거장The Master』(2004), 아들의 죽음을 겪은 마리아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마리아서The Testament of Mary』(2012)로 세 차례나 부커상 후보에 오르며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토빈의 소설은 매번 더욱 원숙해지고 깊어지는 문학적 기량을 보여 주며 2015년, 『노라 웹스터Nora Webster』(2014)로 호손든상을 수상했다. 단편집으로는 『어머니와 아들Mothers And Sons』(2006)과 『공허한 가족The Empty Family』(2010)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