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장창훈 보도국장]=비가 곧 터질 듯, 날씨는 몹시 흐렸다. 우산없이 길을 나선다는 것은 어리석을 정도로 비올 확률은 거의 100%, 기온까지 뚝 떨어져 겨울의 한파는 시베리아 강풍을 동반한 것 같았다. 매서운 육지의 물기없는 겨울바람, 시베리아보다 더 세찬 강풍은 청와대만 왜 맑은 날씨를 주는 것일까? 태풍의 눈이라서 맑은가? 200m앞까지 허용한 법원의 판결이 몹시 궁금하여, 나는 길을 나섰다.
광화문에 도착하자마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같은 뜻, 같은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는지 실감했다. 同志(동지)는 같은 뜻을 말한다던데, 서울시민들은 오늘 동지로서 광화문을 향했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의 틈에 갇혀, 고요하고 유유히 물결처럼 올라아가야 했다. 10분 넘게 광화문역을 빠져나갔다. 숨통 터지듯, 밖에 쏟아져 나왔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편에서 경복궁 왼쪽 고궁박물관까지 단숨에 걸었다. 광화문역 내부의 그 밀폐된 움직임은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했다. 더 거대한 물결들이 청와대를 향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데 그 안에 나도 포함시켰다.
앞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들리지 않았어도, 시민들은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말에 장단 맞추듯 신이 나서 함께 했다. 돈을 준다고 해도 이 추운 날씨에 그렇게 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돈과 어떤 상관없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국민들은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면서 자신들의 소중한 목소리를 함께 건축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그 대열에서 좌측을 빠져 나왔다. 경찰버스들은 촘촘히 도로를 차단했고, 맨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대치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옆으로 길을 틀었다. 경찰버스는 정말로 언론에 보도되었듯이 스티커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꽃과 스티커를 얻어맞은 경찰버스들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폭력시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이 더 소름돋듯 무서웠다.
어떤 불법에 항쟁하는 시민들의 분노는 거대한 군중심리속에 자리잡았는데, 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대규모 집회속에 자신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함께 표출했다는 것이다. 좋아서 하는 일을 ‘취미’(趣味)라고 한다. 전문적으로 시위를 투쟁하는 정치인들과 달리, 시민들은 이번 집회를 표현의 도구삼아서 ‘즐거운 분노’로서 자신들의 걸음을 내디뎠다. 취미활동에 즐겨 쓰던 낙시대는 단체 깃대로 활용되었다.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도처의 전쟁깃발들…… 말(言)의 검(劍)들은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진눈깨비가 쏟아져도 국민들은 미동(微動)할 생각이 없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주(主)는 촛불의 모양을 상형했다고 한다. 촛불을 손에 든 근본적 이유는 국민이 주인(主人)임을 말하는 것일까? 바람이 불어도 촛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는 종이컵이 불꽃을 감싸서이고, LED 촛불이어서이다. 인간촛불들은 그렇게 오늘도 청와대를 향해 작은 소리들을 불태웠다.
사람들의 심리는 모두 비슷했다. 추우면 오뎅국물이 생각나고, 핫쵸코를 마시고 싶어진다. 옆으로 빠져나오자마자 작은 까페가 보였는데, 사람들로 가득찼다. 그곳 화장실은 길게 사람들이 줄을 지었다. 인도(人道)는 그런데로 한산(閑散)해서, 곧장 앞쪽으로 나아갔더니 경찰차의 맨 앞을 볼 수 있었다. 2겹으로 막아진 경찰차들과 지붕위에 한가롭게 앉아있는 경철 몇몇, 그리고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어떤 청년의 구호(口號) 영락, 말의 전쟁이다.
20m 가량 서로 사이를 두고, 그 안에는 사진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오고가면서 사건을 취재하고, 평화롭게 구호와 노래로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다. 춘추전국시대였다면, 사람의 시체가 깔렸을 그런 극적 겨룸이 민주주의 시대여서 말들의 메아리만 효자동에 울려 퍼졌다. 긴장감은 팽팽했지만, 이미 ‘평화로운 표현의 자유’를 선언하였기에, 경찰들처럼 시민들도 분노를 조절하면서 하나로 뭉쳐서 노래로서 지금의 사태를 조롱했다. “야야 야야”의 그 노래는 “하야 하야”로 바뀌어서 시민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고, 청와대의 높고 깊은 권력을 향해 조롱의 비수를 날렸다.
몰입한 생각의 힘으로 에너지가 소진한듯, 머리가 무거웠다. 집회가능 시간까지 함께 하다가, 안국역 근처로 몸을 빠져나와서, 김밥천국의 인파속에서 떡라면과 김밥을 먹고, ‘나오길 잘했다’는 마음의 위안을 스스로 던지면서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