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장창훈 기자]=르네상스는 “재탄생, 재림, 부활, 복원”을 뜻한다. 르네상스가 일어난 시대에는 ‘르네상스’라고 하지 않았다. 훗날 역사가들이 14~16C에 이태리와 유럽에서 일어났던 문예부흥을 통칭해서 “르네상스 운동”이라고 불렀다. 조르조 바사리는 책 “예술가 열전(1550)”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재림이라 하여 이탈리아어로 리나시타(rinascita, 부활)라고 불렀다. 이것을 프랑스 역사가인 쥘 미슐레(1798~1874)가 ‘르네상스(Renaissance, 재탄생)로 번역했다. 르네상스 운동은 예술에서 시작해 종교까지 영향을 미쳤다. 종교혁명도 르네상스 운동의 연장선에서, 인간의 자유와 이성이 발달하면서 ‘종교의 자유’가 분출된 것이다.
르네상스가 제일 먼저 시작한 곳은 이태리 피렌체 지방이다. 지금도 이곳에 가면 건축물과 그림과 조각품이 남아있다. 왜 하필 피렌체일까? 그곳은 지중해 중심지이고, 유럽의 최남단이며, 그리스와 가까운 곳이다. 동로마 교회와 서로마 교회가 서로 결별하면서 문명이 단절됐다. 200~400년 넘게 서로 떨어져 살았으나, 이탈리아는 항구도시였고, 그리스 지역과 소통을 간헐적으로 하고 있었다. 농경사회에서 상업사회로 경제체제가 발전했고, 베네치아와 피렌체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발달했다.
13C 유럽에 대학이 세워졌다. 프랑스 파리대학,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은 기독교를 중심해서 학과가 편성됐다. 유럽의 대학교는 신학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이태리에 세워진 대학교는 신학과 전혀 상관없이 지역사회 갑부가 직접 돈을 내서 대학을 세웠고, 신학을 배우지 않았다. 이태리 교황청이 있어서 신학과가 더욱 필요할 것처럼 보이지만, 이태리는 학문에 있어서 ‘종교로부터 독립’을 추구했다. 이태리에서 ‘르네상스’가 태동한 가장 중요한 여건이 이것이다.
14C에 십자군 전쟁이 끝났고, 자유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돈이 이태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경제가 윤택해지고, 평화의 시기가 도래하고, 학문의 연구가 자유롭게 진행되면서 ‘새로운 뭔가’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때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헌’을 새롭게 연구하는 물결이 급속도로 퍼졌다. 당시 유럽은 1천년 넘게 라틴어 문화권에 있었고, 매너리즘에 빠졌다. 고리타분한 라틴 문화에 신물이 난 젊은이들이 ‘로마와 그리스 학문’을 접하면서 새로운 탈출구를 경험했다. 조선말에 한문책만 보던 선비들이 영어로 된 책을 만난 것과 같았고, 논어와 맹자만 읽던 조선말 선비들이 유럽에서 온 과학책을 읽은 것과 같았다. 중세사회는 고대사회를 새롭게 연구하면서 근대사회로 넘어갈 수 있었다. 과거의 부활은 새로운 창조를 낳는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투르크족에 의해 멸망당했다. 이때 피난민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들고 서방으로 탈출했다. 기독교 신학자들의 책들이 봇물 터지듯 이태리에 들어왔고, 이 책을 읽은 청년들은 전혀 새로운 사고관에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됐다. 인간론에 있어서 중세사회는 그리스-로마시대와 전혀 달랐다. 중세는 인간을 부정적으로 해석했다. 어거스틴 때문이다. 그는 인간에 원죄가 있다고 못을 박았고, 그 죄가 아담때부터 유전된다고 가르쳤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됐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러나 그리스-로마시대의 인간론은 매우 긍정적이고, 인간의 지성과 육체가 아름답다고 묘사했다. 올림픽 경기에서 모든 선수는 옷을 입지 않고 출전했다. 그 이유는 관음증보다 육체미에 있었다. 육체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누드로 운동을 한 것이다.
중세의 껍질을 깨뜨린 결정적인 사건이 단테의 신곡 출간이다. 단테는 피렌체 사람이다. 그는 정치가였고, 사상가였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그가 어느날 교회에서 깊은 묵상을 하던 중, 자신의 영적 현주소를 깨닫게 됐다. 권력을 얻었다고 생각한 그가 사실은 권력의 미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비체험을 했는데, 지옥과 천국과 연옥을 견학한 것이다. ‘연옥’은 성경 개념이 아닌데, 단체의 신곡으로 ‘연옥’은 진리처럼 받아드려졌다.
단테는 당대의 걸출한 실존 인물들을 신곡안에 등장시켰고, 피렌체 언어로 작성했다. 당시 모든 문학은 라틴어로 쓰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단테는 피렌체 언어로 작성한 것이다. 마치 한문소설이 인기를 누리던 시절 한글소설이 출간된 것과 같았다. 문학은 반드시 라틴어로 써야 했다. 단테의 신곡은 민족언어로 문학이 작성되어도 그 작품성이 뛰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단테의 신곡을 읽은 유럽의 문학인들은 그때부터 자신들의 민족언어로 책을 출간하기 시작했고, 결국 성경을 자신들의 국가 언어로 번역하기에 이르렀다. 루터의 성경번역은 단테의 신곡에서 촉발된 민족언어의 혁명으로 이뤄진 결과물이었다. 단테는 자신을 인도하는 길라잡이로 ‘베르길리우스’를 등장시켰는데, 그는 로마의 시인이었고, 이교도였다. 이교도인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은, 교회가 이방인의 도움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창세기에 나온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중세사회에는 감춰졌다. 동방과 서방이 서로 교류를 하면서 비로소 ‘사람됨’과 ‘인간됨’이 무엇인지,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지, 인간의 이성과 감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것이 휴머니즘이다. 기독교는 ‘휴머니즘’을 인간중심으로 매도하지만, 휴머니즘의 출발은 신의 이름으로 억압당한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을 향해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는 모든 인간의 자유가 종교의 감옥에 갇혔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꽃을 피우게 된 결정적 배경은 ‘경제적 부유함’ 덕분이다. 가난한 사람은 결코 예술과 학문에 신경을 쓸 수 없다. 물론, 갑부가 돈을 혼자만 쓴다면 또한 예술과 학문은 발전하지 않는다. 피렌체에는 독특하게 메리츠 가문이 있었는데, 무역을 통해 엄청난 재벌이 되었다. 금융업을 주도했던 메리츠 가문은 돈을 가지고 정치적 안정을 추구했고, 유럽에 있는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피렌체로 불렀다. 메리츠 가문의 모든 돈은 지식인을 양성하는데 사용됐고, 피렌체는 지금의 언어로 예술과 종교로 도시재생이 된 것이다.
피렌체에서 꽃을 피운 르네상스가 유럽 전체로 확산된 것은 구텐베르크 덕분이다. 인쇄술의 발달은 우리가 아는 복사집과 전혀 다르다. 당시 인쇄소는 거대한 기업이었고, 학문의 전당이었다. 인쇄소가 했던 첫번째 업무는 성경인쇄였고, 두번째는 대학교 출판물이었다. 대학교는 동방에서 밀려온 고대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모두 잘하는 사람이 필요했고, 이들은 인쇄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대학의 학문이 인쇄소를 통해 세상으로 퍼진 것이다.
라틴어로 번역된 그리스 고대 문헌이 알프스를 건너 독일과 프랑스와 스페인까지 퍼졌다. 이런 책을 읽은 인물들이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이였다. 고대 문헌을 복원한 인문주의가 종교 개혁가들에게 접목되면서, 성경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됐다. 즉, 루터 당시에 있었던 라틴어 성경이 과연 원본인가? 그들은 의문을 품었고, 본래 성경은 그리스어로 된 것을 알게 됐다.
에라스무스는 라틴어의 대가인데, 그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갔다가 친구가 바울 신학에 정통한 것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다. 에라스무스는 그때부터 성경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리스어를 연구했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된 성경을 모두 취합해서, 1516년에 그리스어 성경을 출간했다. 그가 출간한 신약성경이 후대에 졸작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어 성경’을 에라스무스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한 것은 교황청을 향한 도전이었다. 에라스무스 성경을 읽은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교황청의 면죄부를 정면으로 비판했고, 훗날 성경을 잃은 교황청이 어떻게 타락했는지 철저히 비판하면서, 잃어버린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독일 백성들에게 돌려주게 되었다.
르네상스가 이룬 최고의 결과물은 ‘잃어버린 성경’을 되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출발점은 고대문헌을 새롭게 연구하는 순수한 열정에서 시작했으나, 그 파급력은 결국 교황청을 뒤집게 되었다. 교황청 입장에서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현실로 이뤄진 것이다. 이태리에서 시작된 학문의 자유가 결국 교황청을 무너뜨리게 된 것이다. 1천년 동안 신성불가침 영역에 있었던 성경이 이렇게 사람을 다시 찾아온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발견한 성경 오역만 2천개가 넘었다. 그 중에서 중세시대 모세는 ‘뿔’을 가지고 있었다. 불가타 성경에 모세가 시내산에 내려오자, 뿔이 달렸다고 적혔기때문이다. 대표적인 오역이다. 히브리어로 ‘광채’는 ‘뿔’과 같은 단어를 쓴다. 히브리어를 번역하면서 ‘모세의 광채’를 ‘모세의 뿔’로 잘못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다”고 했는데, “회개하라”를 “고백하라”로 오역하고, 이러한 성경번역에 기초해서 ‘고해성사’의 제도가 만들어졌다. 중세사회 신부들이 성도의 죄를 낱낱이 들으면서 불륜의 씨앗이 형성된 결정적 문구다. 원본과 전혀 다른 성경번역본 위에 세워진 교황의 권위는 결국 무너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