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장창훈]=한반도의 뿌리는 종교국가였다. 이방민족 환웅과 웅족이 정치공동체로 결합한 초기 청동국가는 종교와 정치가 일치된 국가였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제단을 맡은 군주와 왕으로서 ‘임금’(왕검)이 합쳐진 호칭으로서, 종교지도자가 정치지도자를 별도로 선정해서 통치했는지, 1인의 종교지도자가 정치제도를 관할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정치와 종교가 전체 시스템으로 묶였고, 통치법률은 종교에서 관할했다. 이는 중세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중세는 종교가 정치를 지배했었다.
과연 종교와 정치가 일치되면 살만한 세상이 오는 것일까? 나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종교와 정치는 본질적으로 일치될 수 없는 제도이다. 일치될 수 없는 두 제도가 일치되면, 정치는 정치체계에서, 종교는 종교체계에서 상호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종교는 내면적인 영역이며, 각자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면서, 양심에 따라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시스템이다.
반면, 정치는 외형적이며, 법률로서 강제하면서, 통치체제가 분명하다. 물론, 천주교처럼 거대한 종교집단은 종교내부에서 이미 종교가 정치로 운영되겠지만, (교황을 뽑는 과정도 추기경을 통한 민주적 절차에 의해 진행되어, 정치적이다.) 천주교의 신앙관은 정치와 무관하다. 단지, 교황은 트럼프의 당선을 반대하는 정치발언을 하고, 천주교 사제를 통해서 정치운동을 하는 세력이 많지만, 각 개인으로 들어가면 종교는 종교이고, 정치는 정치일 뿐이다.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면 이상세계가 올 것이라고 종교인들은 확신한다. 그 자체가 모순이다. 유대교도, 이슬람도, 기독교도, 천주교도, 불교도 모두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면 이상세계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므로, 과연 어떤 종교가 정치를 다스려야 이상세계가 된다는 것인가? 이러한 종교의 정치지배력은 회교가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성전을 차지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평화를 위한 전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평화를 최우선에 내세우는 종교인들이 전쟁에 가장 극렬한 것이 종교의 딜레마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종교를 축소하면, 영혼이고, 정치를 축소하면 육체이다.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나는 가끔 영혼이 육체를 다스린다면서 신내림을 받은 자들을 본 적이 있다. 영혼을 초혼해서 육체를 지배하는 그러한 행위를 보면, 그것은 정상이 아님을 상식으로 알 수 있다. 육체는 육체로서, 영혼은 영혼으로서 각자 고유한 영역이 존재하며,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독립된 공간은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딸은 딸로서 각각 독립된 생각이 존중하듯이 그러하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자녀들이 부모의 결정으로 결혼을 했지만, 지금 시대에 부모의 강요로 평생의 반려자를 선택할 자녀가 있겠는가? 부모가 자녀를 지배할 수 없듯이,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비합리적이다. 인류가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필요한 시스템이므로, 종교와 정치는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정치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위해서, 종교는 현실의 내면적 성찰과 죽음 이후의 영혼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기에, 신의 창조에 따라 인간 사회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하다면, 종교와 정치는 진보와 보수처럼 우리 가운데 가장 필요한 시스템이므로, 둘의 섞임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제정일치사회는 지렁이, 또는 아메바처럼 사회가 진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생겨난 초기공동체일 뿐이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문예부흥운동은 그 정신의 복귀를 의미할 뿐, 과거시대에 맞는 문화적 옷을 지금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발상일 것이다. 가령, 성경을 논함에 있어서, 베드로는 초기 신앙공동체를 운영하면서 모든 성도들의 재산을 일괄적으로 거두어 공동재산으로 만들고, 모두 함께 먹고, 모두 함께 살아가는 신앙공동체 마을을 형성했다. 그것은 공산주의 개념인데, 결과는 참혹했다. 바울은 베드로와 사도들의 정책에 대해 종종 비판했다. 이유는 모두 함께 모여 살므로 빌붙어 사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과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도, 성경에 그러한 제도를 본받자고 한다면 그것이 옳은가?
시대는 변화되었고,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시대에 맞는 각 사람의 행위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 벌써, 4월이다. 가죽옷과 두꺼운 겨울 점퍼는 서랍장에 들어가고, 반팔을 꺼내서 입는 때가 되었다. 계절만 바뀌어도 옷이 바뀌는데,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로서, 국가권력이 각 국민에게 넘겨진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종교인으로서 각자에게 부여된 민주주의 권한을 행사하지 않거나, 혹여 종교의 이름으로 정치운동을 한다면 그것은 과거 시대의 낙후된 시민의식이다. 현대사회는 제정분리시대로서, 종교는 종교로서, 정치는 정치로서 각각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 옳다.
IS는 정말로 무섭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은 그들에게 상당히 논리적이다. 그들은 성전(聖戰)으로 폭탄테러를 행한다. 그들은 이슬람 국가의 확산을 신의 명령으로 간주하고, 이슬람이 아닌 지역은 식민지 지역으로 생각하면서, 독립투사처럼 자신의 몸을 던져서, 영혼구원을 위해서 목숨을 던지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종교의 정치운동인가?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면 이런 모순이 발생한다. 과거 중세사회에서도 십자군 전쟁이 IS처럼 실행됐다. 정치는 법의 체제로 운영되어야하는데, 종교가 정치와 접목되면 합리적인 법은 사라지고, 신의 명령을 빙자한 통치권자의 명령만 남게 된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그 왕권체제가 바로 종교와 정치가 일치된 독재체제였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황제를 천자(天子)라고 부른 것도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종교의 권위로서 정치적 명분과 권력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종교가 집단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한다. 예수님은 3년의 사역에서 정치운동은 하지 않았다. 정치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은 진보주의자 가룟 유다였다. 로마의 식민지 시대였던 그 당시, 예수님은 세금납부의 곤란한 질문에 대해서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씀으로, 로마의 세금납부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게다가, 3년마다 유월절을 꼬박꼬박 지켰다. 기독교인으로서, 유대교가 이미 분립된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에 있어서, 유월절의 개념이 낯설겠지만, 예수님은 매년 유월절 행사를 예루살렘에서 보냈다. 사도 요한의 요한복음은 그것을 증언한다.
예수님은 로마의 법률, 유대교의 법률을 따르면서, 종교인으로서 가져야할 책무에 대해서, 제자들을 통한 계몽운동을 하셨던 것이다. 그 방법이 너무 파격적이어서, 기존 종교인들이 초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 종교인은 종교인으로서,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본질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