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니클라스 루만]=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는 ‘사회’를 먼저 전제하고, 그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기능별로 구분해서 필요성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사회의 범죄들, 일탈현상, 각종 사회문제와 경제파탄, 전쟁 등등 사회구조 자체가 파괴될 수 있는 위험들에 대한 해석은 무엇으로 할 수 있을까? 사회의 역기능은 사회 바깥에 있는가? 사회안에 있는가?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 필요하다. 더불어, 파슨스가 정의한 그 ‘사회’는 시간적, 역사적으로 어느 시점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하지 못하다. 무엇을 사회라고 하는가에 대한 정의가 없고, 단지 ‘사회’를 정의하고 그 사회에 필요한 기능들을 역할별로 설명하면서 발생하는 근원적 모순인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면서 과연 진정한 사회가 시작된 것인가? 시민혁명을 사회의 탄생으로 본다면 그 혁명 이전은 사회가 아닌가? 이러한 질문들은 사회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면서 발생한다. 니클라스 루만은 ‘사회의 기준’에 대해 다시 정립하기 위해서 도입한 것이 바로 ‘생명체의 정의’이다. 살아있음의 정의는 생명체는 명확하다. 숨을 쉬면서 살아있는 것을 생물체라고 정의한다. 죽음은 곧 모든 기능의 정지상태이고, 살아있는 생물체는 스스로 움직이면서 생물체임을 증명한다. 생물체에 대한 이런 명확한 정의가 존재하듯이, 사회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세계는 힘의 불균형으로 질서가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세계는 점점 공동체 질서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본격화되었으나, 가만히 따져보면 민주주의라는 구조는 형식일 뿐, 왕 대신에 기업의 왕, 권력의 왕, 학문의 왕 등등 크고 작은 왕들이 탄생하면서 다원주의라는 새로운 질서가 점점 형성되어 갔다. 특히 자본주의는 부의 불균형을 유발하면서 ‘권력의 불균형’ 보다 더 심각한 ‘사회 불균형’ 문제를 야기시키면서, 자본주의 구조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 분명 사회는 불균형 상태인데도 사회는 어떤 질서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 그 질서의 근원은 무엇인가? 왕권체제에서는 왕이 모든 힘의 중심이니,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움직이듯이 왕이 질서의 근원이라고 정의하면 모든 것이 간략해진다. 그런데 왕권체제가 무너졌는데도 사회공동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질서의 근원이 왕이 아님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그 명제로서 힘의 근원은 ‘국민들’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책임한 답변이다. 사회학자들은 공동체 질서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 과학자들이 생물을 연구하듯, 전자현미경으로 원자를 연구하듯, 사회문제들을 해부하면서 그 질서의 힘을 찾았던 것이며, 니클라스 루만은 사회과학 분야에서 아인슈타인과 같은 업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