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장창훈 초콜릿 평론가]=초콜릿에 대해, 카카오 열매에 대해, 사람과 원숭이의 근본적 차이가 있다. 취사선택의 물질이 다르다. 성경에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말이 있듯,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취하고, 필요없는 것은 버린다. 선택한 것을 보면 선택자의 사상이 드러난다.
사람은 코코아 열매(코코아콩)을 선택하고, 원숭이는 코코아 과육을 선택한다. 사과로 비유하면 사과 과육을 먹고 씨앗을 뱉는 것이 당연한데, 코코아 열매에 있어서 사람은 유독 코코아콩을 최종 목적으로 모든 재배과정을 거친다. 원숭이는 코코아콩을 둘러싼 과육만 먹고, 씨앗은 통째로 버린다. 쓴 맛 때문이다. 이런 선택과정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선택의 반대편은 동전의 양면처럼 버림이 동시에 발생한다. 인정하기 싫어도 운명적으로 결정되는 구분의 속성이다.
언뜻, 과육도 먹고, 코코아콩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혀 그렇지 못하다. ‘시간’의 속성은 2가지를 동시에 못하도록 방해한다. 순전히 ‘시간’ 때문에 발생하는 사건이며, ‘의미’가 만들어내는 구분경계선이다. 시간과 의미는 선택과 버림을 반드시 양쪽으로 나눈다. 하나를 선택한 것은 다른 나머지를 버린다는 것과 동일하다. 원숭이는 과육을 선택함으로 나머지를 버린 것이고, 사람은 코코아콩을 선택함으로 나머지를 버린 것이다. (과육은 발효과정에서 코코아콩에 흡수되지만, 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물질로 간주된다.)
초콜릿은 사람의 손을 거쳐, 선택과 버림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거친다. 초콜릿은 본래 음료수였다. 소피 역사학자는 ‘초콜릿, 신들의 열매’ 책에서 마야문명에서 아즈텍 문명까지 초콜릿은 음료수였다는 사실을 거론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먹는 ‘죽’(粥)의 형태인지, 혹은 편의점에서 파는 코카콜라같은 ‘음료’인지,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죽(粥)처럼 걸죽하지 않았을까, 나의 추정이다.
이 초콜릿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쓴 맛’을 본격적으로 버리고 ‘단 맛’을 선택한다. 사탕수수 덕분이다. 이후, 코코아 버터와 코코아 분말이 서로 구분되는 압착기술이 발견되었다. 코코아 버터는 기름을 뜻한다. 코코아 기름은 곧 식물성 기름이다. 돼지로 말하면 ‘비계’가 버터다. 코코아빈을 힘껏 짜서 기름과 찌꺼기를 나누고, 기름은 버터가 되고 찌꺼기는 코코아 분말이 된 것이다. 누군가 몰드를 이용한 고형 초콜릿 제품을 만들었고, 그때부터 액체형태가 고체형태로 탈바꿈했다. 선택과 버림의 과정이 또 일어난다.
사람도 과연 무엇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한다. 달달함과 진지함은 동시에 발생하지만, 무개념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고, 미련한 곰이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인내의 동굴에서 스스로 성찰할 수도 있다. 2가지는 동시에 얻을 수 없다. 친구를 만나서 놀던지, 그 시간에 혼자 묵묵히 공부하던지, 친구와 함께 스터디 그룹 공부를 하던지, 친구를 만나서 잡담하며 놀던지, 그 어떤 것을 할 수 밖에 없다.
그 선택은 결국 초콜릿이 단맛과 쓴맛, 액체와 고체에서 어느 하나를 결정하듯 결정하는 것이다. 무엇이 가장 적합할지는 오늘 입을 옷을 결정하듯 스스로 자유의사에 따를 것이다. 하나의 옷을 입는 그 순간, 나머지 모든 옷은 옷장에 남겨짐을 인지한다면 항상 신중한 행동의 옷을 선택하는 지혜로움이 우리에게 있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