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오늘도 성탄절 예배를 드렸다. 일주일의 끝과 시작을 교회에서 하는 것, 1년의 끝과 시작을 말씀으로 한다는 것,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주(主)는 주인이며, 멘토이다. 1년의 끝이 결단코 주(酒)로 마칠 수는 없다. 인생은 그렇게 흐믈거려서는 안되므로.
오늘 말씀 주제는 구주, 사랑의 탄생이었다. 단상에서 울려퍼진 대언자의 화법은 어떤 아나운서보다 명료하고, 단백하고, 청아했다. 말씀은 항상 2가지로 들린다. 목소리와 그 내용이다. 잘 알아듣는 것은 잘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말씀은 영화보듯 감동을 받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영화를 보더라도 자신의 삶과 적용해서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듯, 삶과 접촉된 말씀실천이 필수다. 파란불에 건너고, 빨간불에 멈추라는 교육은 배움과 행동이 동시에 수반되어야한다. 말씀은 교통신호등처럼 반드시 생명을 위해 지켜야할 ‘필수법률’과 같다. 오늘의 말씀이 특히 그러했다.
4000년동안 유대인은 메시야를 기다렸다. 어떤 민족도 기다리지않았다. 오직 유대인만 기다렸고, 유대교로 귀화한 로마 시민들이 그러했다. 산헤드린 의원을 비롯해서, 유대인을 통치한 빌라도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알았고,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대화까지 나누었고, 말씀의 오묘함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결국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기다리는 종교로 끝났고, 그렇게 2000년이 흘렀다.
만약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진정한 왕, 그리스도로 인정했다면, 교황청이 이스라엘에 들어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불어 이슬람교의 성장도 지금처럼 급성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슬람교가 성장한 것은 이스라엘의 위축과 함께 이탈리아에 교황청이 들어서면서 중동지역 통치권이 약화되면서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 받았다면, 이스라엘의 적대관계인 이슬람이 성장할리 만무하다. 이스라엘이 못하니까, 이슬람이 오히려 성장한 측면도 있다. 그렇게 축복은 받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전달된다. 하나님의 사람을 받아드리면, 그것을 조건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받아드린 사람에게 전달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희망이 이뤄지고, 평화와 축복을 받게된다. 이스라엘은 2000년전에 축복을 받지 못하였다. 예수님을 죽임으로, AD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혔고, 디아스포라 민족으로 1948년이 되기까지 유리하는 별이 되었다. 지금도 트럼프가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포했으나, UN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슬람과 이스라엘의 영원한 분쟁지역으로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것이 되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을 받아드리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운명인가?
4000년의 준비기간, 그 당세에 살았던 유대인들이 만약 잘했다면, 그것을 통해 조상들도 빛을 봤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족보에 보면, 단지 예수님의 혈통만 기록되었을 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만 되어있고, 신약은 전혀 다르게 펼쳐지고 전개된다. 처음 초반,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사역만 이스라엘이 주무대가 되었고, 이후 종교혁명은 유럽지역을 통해서 펼쳐지며, 인류 세계사는 유대인보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물론, 지금도 유대민족은 전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트럼프가 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포했겠는가? 유대인이 쥐고 있는 막대한 금융과 정계 권력은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고, 눈치를 봐야할 족속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유대인은 유대인일 뿐이다.
인생은 결국,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사를 하라고 하니, 이사를 하면서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고향을 버리고, 가문의 풍습도 버리고, 혈혈단신으로 가나안으로 향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갔던 그 가나안땅에서 경제적 풍요를 누린 것이 아니다. 엄청나게 고생하면서, 가뭄에 시달리다가 이집트로 피신한 적이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아브라함은 절대로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 또한 함께 동업했던 조카 롯이 더 좋은 땅을 택하는 억울한 일을 당했다. 주도권이 본인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보를 하면서 기름진 소돔과 고모라가 롯에게 돌아갔다. 동업자로서 상대가 더 좋은 것을 취하게 되면 그 마음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는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확신하면서 그 말씀을 지켰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그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은 그때부터 축복을 주신다.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회사도 마찬가지다. 주식을 소유한 자는 회사주식을 통해서 회사에 투자한다. 주식도 없으면서 그 회사를 돕는 것은 말이 안된다. 부모가 자녀를 돕는 것은 가족이라서 그렇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돈을 나눠주는 사람은 없다. 어떤 연결, 사연, 관계, 맺음이 형성되어야 돕는 첫단추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커다란 복을 받을 생각은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진실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은 특별하게 그 사람을 관리한다. 사람이 애완견만 키워도, 주인은 외식을 하면서 애완견 먹을 것을 챙기는데 하물며 하나님이시랴. 관건은 자신이 하나님께 어떻게 하느냐이다. 하나님의 것이 먼저 되야한다. 유대인은 스스로 하나님의 것인줄 알았으나, 하나님의 사람을 받아드리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것이 되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받아드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