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 / 장창훈]=할례와 무할례의 본질을 따지는 사도바울의 로마서 4장은 과연 교회에 어떤 마음으로 다녀야하고,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며, 신실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형식주의자들의 결국이 어떠함을 알려준다. 할례는 실상 선민사상의 세습제도에 불과하다. 특권이며, 교만에 취약한 전통이다.
할례의 세습은 고약하다. 이는 조선시대 이씨가 그 왕족을 이어받듯 그러했다. 왕자들은 1명의 왕만 남겨두고 모두 제거당하는 위험을 가졌으나, 나머지 왕족들은 이(李)씨만으로도 귀족보다 높은 대접을 받고 호사를 누렸다. 공신(貢臣)들도 마찬가지다. 조선을 개국한 1등 공신을 훈구세력(勳舊勢力)이라고 하는데, 기득권층이다. 이성계를 도운 공로로 훈장을 받은 것은 이해하지만, 그들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들이 조선을 개국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훈구세력의 손자들도 같은 혜택을 받았다. 훈장의 되물림 현상은 조선을 망하게 하는 뿌리깊은 가시가 되었다. 조선을 세운 그들의 후손이 조선을 망하게 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짧은 기간에도 발생한다. 대통령을 만든 선거캠프 사람들이 낙하산 인사로 공기업 사장으로 취임하는 것, 또는 최순실처럼 비선실세로 대통령을 이용해 대기업과 정치권을 압박하는 것, 이러한 것은 모두 특권의 변질이다.
할례가 이와 같다. 과연, 할례(割禮)의 약속을 받은 아브람이 얼마나 고독하고, 얼마나 굶주리고, 얼마나 절박하고, 뼈속까지 사무치는 이방인으로 가나안에 정착했는지, 후손들은 모른다. 약속을 받기까지 견딘 인내는 과연 단군왕검을 낳은 그 곰여인의 동굴생활과 비교하겠는가? 낯선 도시에서 유학생활도 고달픈데, 아브람은 단지 친족 몇 명과 함께 멀고 먼 이국땅 가나안으로 이주해, 남의 눈치를 보면서 목축생활을 했다. 그런 고생에도 하나님을 향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으니, 그 결과가 바로 할례의 증표였다.
후손은 아브람이 받은 그 약속을 따라 모두 할례를 한다. 그런데, 그 할례만으로도 모두 ‘아브람함’의 금메달을 목에 거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으니, 어찌보면 불평등하다. 민족은 그저 얻어지는 역할인데, 함께 주어지는 옵션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인이 누리는 권한이 너무 엄청나니 원정출산도 감행하는 한국 어머니들이니, 할례의 특권이 세습되는 것에 무슨 이유를 달까?
선민사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유대인이 그들의 구원주를 십자가에 못을 박은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선민사상(選民思想)은 택함을 받았다는 자긍심을 고취시키지만, 점점 성장하면 결국 교만의 독사과를 내놓는다. 결코 취해서는 안될 사상이 선민사상이다. 이는 백설공주에게 내민 마녀의 금빛 독사과다. 구원의 가치는 날마다 구원을 이룸으로 확증하는 것이지, 특권의 갑옷으로 둘러친 선민사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도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아브람이 과연 할례자로서 하나님의 믿음을 받았을까? 바울의 질문이다. 날카로운 물음에 유대인 전체는 대답을 할 수 없다. 할례가 생긴 그 근본, 그들이 내세우는 아브라함의 약속인 할례, 그런데 아브람은 무할례자로서 할례의 약속을 받았던 것이다. 할례는 하나님의 약속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알면, 이렇게 속지 않는다. 모르니까,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할례만을 고집하다가 하나님의 근본을 깨닫지 못하고, 우둔하게 교만의 동굴에 갇히는 것이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자녀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믿는 부모가 있다. 그러한 믿음은 단지 스스로 위안에 불과하고, 자녀가 어떻게 믿음생활을 하느냐로 모든 운명이 달라지는 것이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자녀는 그 씨앗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왕후장상의 씨앗이 따로 있느냐고 외친 만적의 울부짖음에서 자신들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장로의 자녀가, 목사의 딸이, 믿음에 더욱 신실할 것이라는 안일한 마음이 훗날 자녀를 무신론자로 만들 수도 있다. 장로의 자녀도, 목사의 딸도 단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는 혜택을 가졌을 뿐,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은 그와 별개다. 이는 가나안에 이미 거주했던 토착부족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지리적 위치에 놓인 것과 같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그곳에 살던 토착민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먼 지역에서 이주한 아브람이 약속을 받아, 그 일대를 모두 소유하게 되었다.
실상, 장로가 본래 장로로 태어났던가? 목사가 본래 목사로 태어났던가? 결코 아니다. 모태신앙을 했다고 주장하는 어머니는 스스로 착각에 빠져 자녀가 신앙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태만한 신앙교육으로 자녀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기회를 뺏을 수도 있다. 차라리, 부모는 자신의 과거를 되새기면서, 본래 하나님을 믿지 않던 본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 자녀가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도록 어떠한 신앙철학을 물려줘야하는지, 그것을 밥상머리 교육으로 ‘신앙습관’을 형성시켜야한다.
할례의 약속을 받은 유대인이 할례로서 아브라함의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은 연예인이 자녀가 반드시 연예인으로 성장하는 것, 김일성의 왕권이 김정일에게, 김정은에게 세습돠는 것과 동일하다. 모두 옳지않은 구시대의 폐단일 뿐이다. 오직 물려주는 것은 DNA 유전자이며, 태어남과 동시에 교육과 습관이 책임으로 부여될 뿐이다. 유럽에 교회는 많은데, 신앙인이 적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두 표면적 기독교인들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고, 세상가운데 기독교 국가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 생활속으로 들어가보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 즐비하다. 무늬만 기독교인이면, 그곳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재할 수 없다. 부모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그 구원의 혜택이 자녀에게 그대로 상속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구원은 부모의 평생 신앙으로, 자녀의 구원은 자녀의 행위로서 얻는 것이다. 부모가 금메달을 땄다고 해서, 그 자녀가 동일한 금메달의 영광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자녀가 부모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싶다면, 부모의 정신을 이어받고, 같은 심령으로 국가대표에 선발되어서, 동등한 자격으로 경주에 참여해 승리해야한다. 신앙의 구원도 동일하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을 후손이 그대로 이어받기 위해서는 할례의 증표가 신령하게 효력을 발휘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지켰던 그 믿음생활을 모두 ‘믿음과 행위’로 입증해야한다. 입증을 못하면 그저 장롱속 면허증과 똑같다.
신앙인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사상은 신라의 골품제와 같은 특권의식이다.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그들의 것이니, 한민족으로서, 기독교인으로서, 가질 이유도 기회도 없다. 반면, 교회안에서 그 직분에 따라 자녀들이 나뉘어지는 인본적 사상을 경계해야한다. 자녀는 부모의 직분과 위치로 결정되는 존재가 절대 아니다. 자녀는 자녀 스스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이뤄야할 사랑의 피조물이다. 부모가 그 자녀의 구원을 결코 결정할 수 없듯, 장로와 목사와 권사와 각종 사명으로 자녀의 계급을 결정짓는 판단은 신앙인이 반드시 삭제해야할 ‘유대인적 특권의식’인 것이다. 구원을 이루는데 무용지물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장애물이고, 훼방꾼들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4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한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