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 / 장창훈]=담대(膽大)는 두려움을 전제한다. 담대한 자에게 “담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두려움과 공포에 직면한 자에게 “담대하라”고 한다. 스위치를 켜는 것은 어둡기 때문이요, 에어콘을 트는 것도 덥기 때문이다. 봄은 겨울을 전제한다. 그처럼 담대는 두려움이 있는 곳에 해당되는 단어이다. 두려움은 무엇인가?
공포(恐怖)는 모두 마음의 문제이다. 외부의 문제에 대한 내면의 인식에서 발생한다. 공포(恐怖)의 본질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 마음 심(心)이 공포(恐怖)의 한자에 모두 들어있다. 恐은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을 말하고, 工凡心을 합쳐보면 마음이 굽어서 움추려진 마음이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마음이 바짝 쫄아들면서 움추린다. 외부의 어떤 상황에 대한 내면의 인식으로 작용되는 것이다. 외부의 사건이 직접 마음을 움츠리게 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사건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한 것이다. 포(怖)는 마음 심(心)에 베 포(布)가 합쳐졌다. 마음이 수건처럼 쫙 펴지는 상태다. 바짝 긴장한 상황을 의미한다. 두려움은 모든 것을 초긴장 모드로 바꿔버린다. 잠은 평안함과 조용함이며, 두려움은 ‘잠’이 달아나버린다. 평화로울수 없다. 고요할 수가 없다. 두려움은 빨래줄이 팽팽히 잡아당겨진 상황인 것이다. 율(慄)도 두려움이다. 마음 심(心)과 밤 율(栗)이 합쳐졌다. 밤을 깐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가시 때문에 그렇다. 또한 사람이 밤송이처럼 솜털이 바짝 서는 상태, 고슴도치처럼 온 몸이 긴장한 상태, 그것이 곧 두려움이다.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다.
인생은 살면서 다양한 상황을 직면한다. 하늘은 맑거나 흐리거나 비가 오거나 폭풍우가 치거나, 맑다가 개거나, 혹은 구름사이에 햇살이 화창하거나 그러하다. 날씨는 사람이 어떻게 바꿀 수가 없다. 반면 마음의 날씨는 바꿀 수가 있다. 비가 내린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까지 비가 내릴 이유는 없다. 외부의 날씨에 따라 그대로 반응하는 것은 내면이 외부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영향은 받겠지만 종속되어서는 안된다. 겨울은 춥다. 그렇다고 사람까지 추울 이유는 없다. 옷을 따뜻하게 입으면 추위는 막아진다. 이처럼 외부의 환경이 내면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방책을 마련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담대함의 방패’요, ‘용기의 갑옷’인 것이다.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다. 담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담대함의 마음을 갖게 된다면 외부의 환경에 종속되지 않고 내면 깊은 곳에서 평안과 용기가 샘솟는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에서 하나님은 “담대하라”고 하신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샘솟는 담대함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진정한 평화이다.
어두운 밤, 칠흑같은 밤, 갈릴리 호수 수면위로 뭔가 물체가 나타났다. 제자들은 놀래서 “유령이다”라고 소리쳤다. 그때 예수님이 “나다. 두려워말라”고 말하니, 베드로가 “주님이시면, 저에게 오라고 명하소서”라고 했다. 베드로가 배 밖으로 나와서 수면위로 걸어가면서 빠졌다고 나왔다가 발버둥을 치면서 살려달라고 허우적대니, 예수님이 “왜 파도를 보느냐”고 꾸짖었다. 이는 실화다. 두려움은 곧 파도의 환경을 보는 것이고, 담대함은 주님을 보는 것이다. 누구를 보느냐로 마음의 상태가 달라지는 것이다. 두려울 수 밖에 없는 환경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반면, 내면은 바꿀 수 있다. 내면이 담대함으로 바뀌면, 그 담대함으로 외부의 어려움을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리고성의 함락이다.
여호수아 백성앞에 첫 번째 관문은 여리고성이었다. 너무나 견고한 철옹성 여리고성, 수나라도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고구려가 대군을 물리친 것은 철옹성에 숨어서 버텼기 때문이다. 싸우지 않고 성을 지키면, 뺏는 입장에서는 수십배의 힘이 더 들어간다. 철벽 수비를 하게 되면 공격하는 팀에서는 뚫기가 너무나 힘들다. 히틀러와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함락하는데 실패했던 것이 ‘그 지역의 철옹성’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7일의 전투로서 여리고성을 함락했으니 엄청난 기적이었다. 그 방법은 심리전이었다. 두려움은 이스라엘 백성과 적군도 동일했다. 적군이 두렵지 않았다면 성문을 열고 나와서 싸웠을 것이다. 그들은 문을 걸어잠궜다. 이스라엘 백성도 두려웠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매일 성주변을 1바퀴씩 돌면서 찬양의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7바퀴를 돌면서 함성을 지르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부르니, 성벽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고 기록되었다. 인생의 모든 일이 이처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공포(恐怖)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이 두렵듯, 여리고성도 이스라엘이 두려웠다. 공포의 여건은 모두 비슷했다. 다른 것은 외부의 공포를 인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여리고성은 계속 이스라엘 백성의 진군하는 모습, 행군하는 모습을 보았고, 이스라엘 군대는 여리고성의 내부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오직 하나님만을 쳐다보고, 율법을 낭독하면서 하나님의 약속만을 쳐다보았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성패를 결정했다. 두려움의 상황에서 과연 누구를 의지할 것이냐, 그것이 인본과 신본의 갈림길로 나뉜다. 보이는 환경을 의식하면 두려움이 엄습하여 도망칠 것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봄으로 의지하면 두려움이 담대함으로 바뀌면서, 두려운 환경과 맞서 싸워서 이길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다.
내 인생 가운데 깊은 어둠이 찾아온 적이 많았다. 앞이 보이질 않는 감옥같은 시간에, 절망이 바닥에 깔렸든 그 때마다, 나는 하나님을 인정하려고 몸부림쳤다. 지렁이처럼 밟히면 밟히는 그런 존재로서 약한 나에게 하나님은 살만한 새로운 길을 열어서 지금의 현재까지 이끌어 주셨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곳이 곧 어둠과 절망이었고,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곳이 빛의 낮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