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종교로 왕권강화
[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왕권강화에는 반드시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법률, 다른 하나는 종교다. 북한의 경우, 공산당을 중심으로 통치구조가 갖춰져 있고, 종교는 무신론인데 ‘김일성 가족 우상화’의 맹신종교(盲信宗敎)가 세뇌교육으로 실시된다. 북한도 왕권통치에 해당한다. 과거 조선시대였다면 ‘북한의 통치’도 인정받았겠지만, 지금은 민주주의 문명이 보편적인 시대여서, 북한이 욕을 먹는 것이다. 어쨌든 한반도의 삼국시대는 J이 탄생한 0세기 즈음부터 시작했고, 왕권강화는 반드시 필요했다.
법률이 없다면, 왕의 힘도 없다. 신하가 잘못했으면 법률에 따라서 그 신하를 감옥에 넣을 수 있어야하는데, 단지 왕의 말을 안들었다고 칼을 뽑으면 국가는 곧 내분에 휩싸인다. 그래서 법령제정은 매우 중요했다. 삼국은 각 시기별로 율령(律令)을 반포했다. 왕권통치에서도 법률은 존재했지만, 왕은 법률의 지배를 받지 않고, 그 위에 존재했다. 왕은 사실상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일부 권한을 귀족들과 나눴다.
왕권통치에 불교가 활용됐다. 불교는 왕을 부처로 보게하는 교리가 있다. 현재 왕이 왕인 이유는 전생의 왕이 될 덕행을 행했다는 교리가 있다. 말같지도 않은 종교 교리인데, 아버지를 잘 둬서 왕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왕이 된 것이 불보듯 뻔한데 불교의 황당한 전생의 교리가 백성들에게 전파되면서, 왕은 가만히 앉아서 ‘부처러서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불교의 전파가 곧 왕권강화와 직결되어 있어서, 삼국시대에 모든 왕들은 불교전파에 주력했다.
왕즉불(王卽佛) 사상이 바로 ‘왕이 부처다’는 의미다. 단군왕검(檀君王儉)과 그 성격이 약간 비슷한데, 단군왕검은 종교적 왕이 정치까지 담당한 것이고, ‘왕즉불’에서 왕은 정치만 관여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현세에서 삶은 고달프지만, 불교를 믿으면 내세(來世)에 좋게 태어난다고 하니, 현실가운데 착하게 살라는 그런 암묵적 명령이 담겨져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다.
7C 중반 삼국이 통일할 때까지, 한반도는 전쟁의 도가니였다. 600년동안 전쟁이 끊이질 않았으니 백성들은 파리목숨과 같았다. 크고 작은 나라들은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4개로 압축되었다. 부여는 최초 가장 크게 성장했으나 의외로 힘을 쓰지 못했고, 백두산 우측에 있던 옥저와 동예도 고구려에 흡수됐다.
백제는 가장 먼저 국가를 정비하고 한반도에서 세력을 떨쳤는데 한강덕분이다. 한강을 차지한 자가 한반도를 차지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한강은 본래 백제의 터전이었다. 주몽을 고구려의 왕으로 만들어준 서소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한강에 정착했다. 그 지역이 지금의 강동지역 몽촌토성이다. 형 비류는 인천에서 국가를 세웠고, 동생 온조는 몽촌토성에 국가를 세웠는데, 결국 동생 온조가 비류를 흡수했다.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와 전쟁에서 고국원왕을 죽였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원통스럽게 전쟁에서 죽자, 그의 아들 소수림왕은 ‘원한’을 갚기 위해서 고구려를 다시 정비하고, 소수림왕의 터전위에서 조카였던 광개토대왕이 왕으로 등극해, 중국과 한반도에 대제국을 건설한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장수왕 시절 가장 부흥했다. 신라의 내물왕 시절,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대를 보내서 신라의 왜군을 물리친 사건이 매우 중요하다.
신라는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 국가를 세웠는데, 박씨가 왕권을 세습하지는 못했다. 신라는 김씨의 나라다. 신라 초기 박씨, 김씨, 석씨가 돌아가면서 왕권을 차지했다.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은 내물왕때부터 사실상 김씨가 왕권을 독점했다.
내물왕 시절만 하더라도 이웃의 가야는 세력이 굉장했다. 금관가야와 대가야가 세력이 컸다. 그 중에 금관가야가 중심이었다. 광개토대왕이 5만의 대군으로 신라를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치자, 그 왜군이 금관가야쪽으로 도망쳤다. 광개토대왕은 금관가야까지 토벌했다. 이로 인해서 가야국이 졸지에 풍지박산이 되고 말았다.
가야국은 백제와 신라에 끼여 있는 나라여서, 우측과 좌측에서 수시로 싸움을 걸어와서 국권이 튼튼해질 수가 없었다. 왕권이 강화되려고 하면, 외적이 침입했다. 마치 한반도에 중국과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이 수시로 넘나들던 조선말과 비슷하다.
가야국은 일본, 인도, 낙랑(대동강) 등 해외 무역이 상당히 활발했다. 가야의 김수로왕은 인도공주와 결혼해, 자녀를 낳았다. 단군왕검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국제결혼을 했고, 가야국의 초대왕 김수로왕도 국제결혼을 했다. 단군왕검의 가족은 아버지가 외국인, 어머니가 한국인이고, 김수로왕은 외국인 부인과 결혼한 것이다. 한반도에 김씨가 500만명이 넘는데, 대부분 김해 김씨이다. 김해 김씨는 김수로왕의 김씨를 의미한다.
삼국의 발전과정을 보면 꼭, 대통령 선거를 보는 듯 하다. 고구려처럼 힘이 센 인물이 통일을 할 것 같은데, 백제처럼 유리한 지역을 차지한 인물이 대통령이 될 것 같은데, 생각지도 않은 신라가 늘상 통일의 주인공이 된다. 신라가 잘한 것은 외교력이다.
일본이 쳐들어와 멸망직전에 있었을 때, 적국이지만 당당히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법흥왕때 금관가야를 복속하고,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을 크게 중용한다. 김유신은 대가야 멸망에 큰 공을 세운다. 한강을 차지한 신라는 결국 당나라의 외교력을 끌어들여서 삼국통일의 주인공이 된다.
고구려의 힘을 빌려 일본을 물리치고, 금관가야의 힘을 빌려 대가야를 물리치고, 백제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물리쳐 한강을 차지하고,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주인공이 된 신라의 한반도 통일에 대해서,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자주적 통일이 아니다” VS “외교력을 발휘한 자주통일이다”로 나뉜다. 국제사회를 살아가고, 공동체속에 존재하는 우리는 외교력도 ‘국방력’ 못지 않게 중요함을 인지해야할 것이다. 6.25 전쟁도 UN의 외교력으로 북한을 물리쳤지 않던가? 미국의 외교력으로 일본의 식민지도 끝났지 않던가?
한반도에 존재한 국가들
한반도에는 초기 국가가 많았다. 우후죽순처럼 부족 연맹체가 이뤄졌다. 고조선에서 준왕이 쫓겨나면서 철기문화는 한반도 남부에 전해졌고, 부여, 고구려, 백제 순으로 나라가 건국되었다. 국가의 기틀을 먼저 잡은 고구려 때문에 동쪽 함흥지역 옥저와 강원도 동예는 나라로 성장하지 못하고 고구려에 부속되었다. 삼한지역의 변한에 있던 가야도 백제와 신라에 끼여서 가야국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끝내 신라에 부속되었다.
초기 국가는 중앙집권식 왕권체제가 아니었고, 부족연맹체제로서 분권형 왕권체제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비슷했다. 신라의 화백제도는 대표적인 분권형 왕권체제였고, 고구려도 4출도가 있어서 왕은 중앙의 대표격이고, 나머지 4곳은 각 부족이 통치했다. 자치권이 존재했다. 왕은 4부족에 갇힌 신세라고 할 수도 있다. 제가회의를 통해서 고구려는 행정제도를 다스렸다.
삼한지역에 존재한 천군은 제사장이다. 천군이 다스리는 지역은 소도라고 불린다. 이곳에 죄인이 들어가면 왕도 어떻게 하지 못했다. 종교적 치외법권 지역이다. 고조선은 제정일치 사회였다면 삼한은 제정분리시대였다. 소도는 대립과 갈등을 봉합하고, 사회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옛날 민주화 투쟁이 발생하면 명동성당이 이런 역할을 맡았다. 가족 공동체에서는 어머니의 품이 소도다. 큰 잘못을 범하면, 어머니의 품에 들어가서 잘못했다고 하면 아버지도 어떻게 하지를 못한다. 소도는 갈등의 해결사다.
대한민국 대표 민속놀이 윷은 부여에서 전래되었다. 윷은 도-개-걸-윷-모로 진행된다.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이다. 爻(점칠 효)는 윷 4개를 의미하며, 바랄 희(希)는 윷을 천위에 던지는 행위다. 윷을 던지면서 ‘모’가 나오길 바란다. 윷은 본래 점치는 도구였고, 나중에 전쟁의 전략을 연구하는 모형 전쟁놀이였다. 부여는 고구려에 정복당했지만, 윷놀이가 전통놀이로 내려올 정도로 한반도의 종주국이었다. 백제도 성왕때 남부여로 개칭할 정도다. 고구려의 대부분 행정제도는 부여와 비슷하다.
고조선 법률은 8조금법이다. 부여는 1책 12법이 있었다. 부여의 법률을 검토하면, 살인자는 사형에 처했다. 계급사회였다. 일부다처제이다. 가부장제도이다. 형사취수제(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취함) 우제점복(소발굽으로 점을 침, 거북점과 흡사) 순장풍습 등이 있다. 고구려에는 서옥제가 있었고, 옥저에는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둘은 닮았으나 달랐다. 고구려 서옥제는 데릴사위제 형식이다. 남자가 결혼할 여자 집에 들어가서 일손을 도와주고, 여자가 크면 남자 집으로 돌아왔다. 노동력을 제공한 댓가로 여자를 데려온 풍습이다. 민며느리제는 예비며느리 제도이다. 여자는 남편 집으로 일찍 들어가서 살다가 모두 성장하면 남편이 처갓집에 가서 돈을 주고 결혼을 했다. 서옥제와 민며느리제의 공통점은 집안과 집안의 결혼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댓가를 지불했다.
삼한에 ‘두레’가 있었다.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 함께 협력해야한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벼를 심어야 금방 끝난다. 서로 돌아가면서 논에 벼를 심는 것, 그것이 두레조직이다. 마을공동체를 운영함에 있어서 두레정신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2000년 전 한반도에 거주한 주민들은 함께 협력해서 살았는데 지금 우리는 협력시스템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어서 그런 것일지 모르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함께 힘을 모을 일이 의외로 많다.
종교행사는 국가마다 명칭이 달랐다. 부여-영고, 고구려-동맹, 동예-무천, 삼한 수릿날과 계절제이다. 부여의 영고(迎鼓)는 북을 치면서 맞이하는 종교행사다. 고구려 동맹(東盟)은 동명성왕(주몽)을 추억하면서 맹세하는 행사이다. 동예의 무천(舞天)은 하늘을 향한 춤이다. 삼한은 5월 수릿날, 10월 계절제(추석)을 기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