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요즘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의 질문하는 교실, 이재정 경기교육감의 토론 교실이 인기(人氣)다. 발표와 질문을 통해서 정보를 소통하고, 논리력과 사고력과 사교력(社交力)을 향상시킬 수 있으며, 인성과 감성과 지성과 공성(共性)을 개발할 수 있으니, 토론은 가장 탁월한 책상이다.
하브르타식 교육법도 ‘질문과 대답’을 통한 말하기 훈련이다. 토론의 축소판이다. 우리나라는 밥상머리 교육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특별한 사건에 대해서 밥먹다가 혼내기도 하고, 칭찬도 하고, 돌려서 말하기도 하고, 반드시 봐야하는 TV드라마처럼 밥상머리 교육은 필수과목이었다. 밥상머리 교육도 알고보면 공개토론이다. 방청객에 해당하는 자녀들의 질문이 허용되지 않아서 그렇지, 벌써 생각은 밥상위 숟갈 옆에 나란히 질문을 올려놓고 유유히 돌아선다.
토론대회의 원본을 독일이나, 그리스의 철학자들에게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민주주의가 발달했으니 토론도 그들의 전유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 예송논쟁 역시 토론이다. 조선시대 당쟁의 토론대회는 이기는 쪽이 진 쪽의 목숨을 가져가는 전쟁의 토론이었으니, 우리 조상들의 토론경쟁은 살얼음판이고, 칼날이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
중국 춘추전국시대는 토론의 광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은 언제나 인재를 찾았고, 날마다 이력서를 제출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이웃나라의 인재를 스카웃하려고 거금(巨金)을 투자하고, 요즘 축구팀보다 더 치열하게 인재를 발굴하고,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이 치열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는 국적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기용했으니, 기회의 시대였다. 기회를 얻기 위해서 면접에 임하는 사회 초년생들은 ‘토론의 달인’이 되려고 무수한 발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연습했다. 춘추전국시대는 전쟁과 함께 토론의 시대였다.
강태공이 제후로 임명받은 제나라의 수도는 임치였다. 임치성의 성문은 13개였는데 직문앞에는 토론광장이 있어서 누구나 자유롭게 발표하고, 질문하고, 반론을 제기하고, 주제발표도 하고, 세미나도 개최하고, 좌담회도 열고, 연구업적도 발표하고, 새로운 학설에 대한 발표도 맘껏 했다. 서울시청 잔디광장을 연상하면 안된다. 그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좋았다.
제나라는 토론자들을 위한 대저택을 짓고서 학술연구 및 토론발표를 할 수 있는 인재에 한해서, 저택에 거주하면서 차관급 봉급을 지급 받았다.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맘껏 발표하고 상대방의 학설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비판하면서 토론회에 참여만 해도 최고급 아파트와 차관급 봉급이 주어졌으니, 제나라가 글로벌 인재양성에 엄청난 국가예산을 투입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했다.
백가쟁명은 발표도 자유, 비판도 자유였다. 침묵은 허용되지 않았다. 새가 새소리를 내듯, 백가쟁명에 참여하는 모든 지식인은 반드시 ‘자신의 사상’을 펼칠 수 있어야한다. 말의 호소력이 있어야만, 국가에서 건립한 보금자리 주택을 얻고 무료로 식사를 제공받고, 봉급까지 받을 수 있었다. 말만 잘하면 왕처럼 대접받고, 말을 못하면 거지처럼 구걸을 해야했다.
백가쟁명(百家爭鳴)에서 가(家)는 집이다. 집에는 식구들이 산다. 그 분야에서 상당한 전문실력을 쌓고서 인정받았을 때, ‘家’를 붙인다. 家에는 제자들도 포함된다. 백가(百家)는 전문가 100명을 의미하고, 그들의 제자까지 합하면 최소 500명이나 된다.
쟁(爭)은 손(爪)과 손(又)과 지팡이(丨)가 합쳐졌다. 서로 손을 뻗어서 지팡이(권력)를 차지한다는 뜻이다. 爭은 손으로 잡고 뜯는 다툼이다. 명(鳴)은 새의 울음이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은 전문가 100명이 떠드는 사상전쟁이다. 쉽게 말하면, 500인 토론대회를 말한다.
공자(孔子)는 인(仁)을 중시한 정치인이다. 묵자(墨子)는 공산주의적 종교가이다. 둘은 시대가 달랐으니 만나서 사상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을 가진 자들과 묵자의 사상을 가진 자들이 직문앞에서는 치열한 격론(激論)을 펼쳤고, 공자와 묵자가 사상적으로 충돌하면서 새로운 학문이 토론을 통해서 만들어졌다. 때론 공자가 이겼고, 때론 묵자가 이겼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고,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누가 옳은가? 직문앞에서는 찬반논쟁이 날마다 벌어졌고, 논리의 산맥은 그렇게 집대성되었다.
사상(思想)의 갈라파고스를 묻는다면, 그곳은 바로 제나라 직문앞이었다. 백가쟁명을 즐기는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을 통해서 각 분야 학문의 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물론 가장 빠른 진화는 병법과 정치학이었다.
※ 직문(稷門)에서 직(稷)은 기장쌀을 말한다. 모든 곡식중에서 가장 귀한 쌀이어서 제사상에 올려졌다. 쌀의 황제가 바로 ‘직’(稷)이다. 직문앞에 토론광장을 설치하고, 중국 전역의 인재들을 불러모아서 토론회를 통해 인재발굴을 했던 것이다. 직문에 모인 인재들은 직(稷)처럼 귀한 인재들인 것이다. 제(齊)가 벼에 맺힌 이삭과 쌀을 본뜬 모양이니, 직문(稷門)도 농사짓는 상황에 맞춰서 비유로 지어진 이름이다. 종묘사직(宗廟社稷)에도 ‘직’(稷)이 사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