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나는 언어 전문가이다. 단어가 설탕처럼, 아메리카노처럼, 풋고추처럼 좋다. 또한 사람의 관계가 좋고, 때론 그 관계가 ‘그러나’처럼 힘겹다. 연결될 때는 너무 기쁘고, 어긋날 때는 너무나 슬프다. 나는 글쓰기보다 사람의 관계형성을 위한 언어의 소통관계에 상당히 민감하다.
나는 언어를 소통의 도구로 생각한다. 언어는 전달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말은 오직 관계형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공지사항을 전달하거나, 직장에서 상사의 지시사항은 그 내용전달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우리가 대부분 살아가는 생활은 언어소통과 함께 관계형성이 중요하다.
까페에서 아줌마 부대가 그 어떤 주제도 없이 무작정 떠들고, 좋다면서 박수치면서 그렇게 왁자지껄하게 놀다가 사라진다. 혹자는 그런 광경을 보고서 “할 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내용의 주제가 중요하지 않고, 그저 말을 가지고 놀다가 간 것이다. 관계형성을 위해 언어가 도구로 활용된 것이다. 운동장에서는 축구공을 가지고 아무 말없이 신나게 논다. 그처럼 까페에서 말로 서로 떠들고 논 것이다. 특별한 내용이 없어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토론대회를 하다보면, 사람들은 이기기 위한 토론, 말싸움을 한다. 나도 그런 토론에 매우 익숙하다. 논리싸움으로 공격형 토론이 한국의 교육에 정착되었다. 그런데, 이기는 토론은 결국 사람을 잃는다. 이김의 주된 목적이 무엇인가? 전쟁은 이기면 전리품이 있다. 토론에도 전리품이 있을까? 전혀 없다. 토론대회 우승자에게 상품이 있다면 모를까, 우리가 생활속에서 즐기는 대부분 토론은 말의 즐김에 있고, 상대의 마음을 얻는 데 있다.
그래서 말싸움보다는 상대의 마음을 얻는 화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냥 상대의 말에 맞장구를 치라는 것이 아니다. 말의 흐름을 파악하면서 상대의 의중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게 대답을 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다. 의견의 충돌은 결국 냉전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은 ‘언어소통’은 관계 목적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것이다. 말을 하는 그 순간 상대방과 인맥이 형성된다. 그것을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다. 말속에 마음이 묻어나는 것이고, 말에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나는 그래서 언행일치의 삶을 살려고 평소 책임있는 인생을 살아낸다.
가령, 어떤 학생이 글을 열심히 작성했다. 그 글에 대해 맞춤법이 틀렸다고 하자. 나의 과거는 그런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지적하고, 반드시 고치라고 요청했다. 나의 그런 태도로 그 학생은 글쓰기의 즐거움을 상실하였다. 과연 나는 잘했는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 신인감독이 시나리오를 잘못 선정해서, 영화를 촬영하다가 ‘이 작품은 망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희생양을 찾기 위해서 신인배우의 연기를 트집잡는데, 그런 태도는 옳지 못하다. 결국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이다. 설령, 신인배우의 연기가 부족하다고 하여도, 격려하고, 잘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할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해야지, 그저 희생양을 삼아서 신인배우의 앞길을 가로막는 신인감독은 양심불량인 것이다. 이처럼 의사소통은 내용전달과 함께 상대방과 관계도 동시에 진행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