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오늘 수요예배 말씀은 내 심장이 전율하는 감동이 왔다. 정명석 목사님이 내 신앙의 멘토이며, 내가 삶의 표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분인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안심이 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과외 교사가 실력이 있어도 학생은 안심한다. 담임교사가 출중해도 학생들은 자랑스럽고 안심한다. 하물며 영혼을 인도하는 목회자의 실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수술을 하는 때에도 병원을 따지고, 의사 실력을 따진다. 왜냐면 자신의 몸의 병을 치료해야 하므로, 하물며 영혼의 병을 치료함에 있어서 그 실력을 따지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영혼의 병을 치료하고, 영혼의 길을 안내하는 것은 외부의 평판이 중요하지 않다. 오직, 신령한 능력으로서 말씀과 사랑과 진리로서 입증된다. 사랑은 곧 진리의 행함이고, 진리는 곧 사랑의 심장이다. 그는 오늘도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분명하게 알려주면서, 인생길의 길라잡이가 되어주셨다.
시작부터 그는 “삼위와 일체되는 신앙을 해야한다”라고 강조하셨다. 그 말씀은 어떤 관념적인 말씀이 아니고, 위로의 말씀도 아니었다. ‘삼위와 일체’는 절대적인 것이다. 일체되지 않은 것은 ‘죽은 신앙’이라고 정의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일체되어야 살아있는 신앙이다.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중에 반석위에 세운 집의 비유가 있다. 모래위에 지은 집은 홍수가 발생하면 무너지고, 떠내려간다. 반면 반석위에 세운 집은 홍수와 비바람이 불어도 떠내려가지 않는다. 반석과 모래는 확연히 다르다. 바위위에 바위가 놓여져 있는데, 가운데 흙이 있다면 장마속에 흙이 쓸려가면서 바위가 기울거나 무너질 위험이 있다. 매사에 모든 일이 그렇다. 밑의 반석은 그리스도요, 위에 올려진 돌은 곧 개인이다. 사이에 낀 ‘흙’은 자기주관, 각종의 인본적인 것들이다. 흙을 제거하고,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체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삼위와 일체 신앙이다.
일체(一体)는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객체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접착제가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의 접착제는 바로 진리요, 사랑이요, 뜻이요, 믿음이다. 삼위와 일체되기 위해서는 오직 진리와 사랑으로 일체되어야한다. 일체되지 못하면 죽은 신앙이다.
겟세마네 동산의 제자들 사건도 말씀중에 거론됐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말씀은 곧 “마음대로 육이 움직이지 않으니, 곧 죽은 자다”라고 말씀했다. 진리를 행하지 않으면, 죽은 신앙이다. 그리스도와 일체되어야하고, 삼위와 일체되어야한다. 일체되면, 성령과 함께 하며, 얻는 것도 다르고, 행함도 다르고, 깨닫는 것도 다르다. 일체되지 않으면 얻는 것이 늘상 별볼일 없다. 마치 접붙임이 없는 고염나무는 똘감이 열린다. 삶의 열매가 늘상 똘감 정도면 그것은 일체되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다. 일체되면 성령이 항상 가르치고, 돕고, 교육하고, 깨닫게 해주신다. 수시로 일체됨으로 성령과 대화를 하고, 성령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성령과 일체되면, 성령은 만물로, 자기 생각으로, 사람으로 수시로 돕고 대화를 하며, 깨닫게 하신다. 얼마나 아름다운 성령의 데이트 신청인가? 성령의 미팅인가? 성령의 포옹인가? 성령과 같이 살아가는 사랑의 달콤함인가?
흙이 도대체 무엇인가? 반드시 파내서 없애야겠다. 그리스도의 반석위에 내 인생을 반듯하게 올려놓으리라. 내 삶의 중심은 오직 그리스도가 차지하게 하리라. 정녕코 그렇게 하리라.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도 오늘 말씀중에 나왔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말씀이다.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어라’는 노래가 버스안에서 지금 울려퍼진다. 정말로 성령의 밧줄로, 성령을 사랑하는 진리의 밧줄로 나를 꽁꽁 묶어서, 단단히 묶어서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리라. 그것이 정녕코 정답임을 나는 확증한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완전히 일체되었다. 일체되지 않은 나무는 버려져, 땔감으로 사용된다. 일체되면 거봉이 열린다. 접붙임도 동일하다. 감나무의 접붙임은 밧줄로 꽁꽁 묶어서 진행된다. 그리스도와 완전히 접붙임을 한 고염나무는 열매가 다르다.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절단하고, 그리스도의 진리로 접붙임을 받아야 맺는 열매가 다르다.
삼위일체(三位一體)는 성부, 성자, 성령의 각위가 뜻으로 일체가 되어서 행하는 것이다. 삼위는 각위로서 같은 뜻을 행함으로 일체된 것이다. 부부일체와 같다. 삼위일체이듯, 삼위와 일체된다면, 삼위의 능력이 자신에게 임하여 하는 일이 특별하다. 왕과 일체된 자는 얻는 혜택이 다르다. 통장과 일체되면 얻는 것이 그 주관권이고, 대통령과 일체되면 얻는 것이 국가급이며, UN과 일체되면 얻는 것이 세계적이다. 성삼위와 일체된 자는 그 얻는 것이 천주급이다. 일체된다는 것은 그 진리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매 순간 성삼위와 대화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깊고 오묘한 말씀을 듣는데, 내가 전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나는 정녕코 그의 사람이다.
* 해당 칼럼은 정명석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작성한 감동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