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펌 금지 ))
오늘도 진리의 새벽별이 70분 동안 떴다.
오늘은 ‘두려움의 하나님과 원망금지와 회개와 관용과 용서’를 말씀하셨다.
‘남자인 너’로 표현되는 어떤 인물에 대해서다. 그 말을 들을 때, “뜨끔”했다. 나도 남자에 해당되므로, 글쓰는 사람으로서 그를 좋게 표현한다고 한 것이 혹여 결례를 범할 수도 있으니, 스스로 마음을 겸비하면서, “펌 금지 정책”을 추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가 진실함과 진지함과 관용과 너그러움으로 말씀하셨는데, 이 글을 통해 표현된 것은 극히 일부일 수 밖에 없다. ‘남자인 너’의 직업이 대략적으로 설명되어졌다. ‘나’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한 사람을 들어서 전체에게 말씀한다”라고 하셨다. 원망하다가 점점점 사망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충격적으로 깨닫게 된다.
본래 내가 했던 글쓰기는 성경상고를 통해서 신앙칼럼을 쓰는 것이다. 이 글을 끝으로, 새벽말씀을 직접 감동후기로 작성하는 것은 멈춰야겠다. ‘남자인 너’의 직접 대상이 나는 아니지만, 그 말씀을 통해서 내 삶을 돌아보며, 빨간불앞에서 멈추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말씀의 실천’에 해당한다. 그의 말씀을 준행하여 내게 적용하는 것이 그와 상관있는 것이다.
원망(怨望)은 원한(怨恨)에 사무치는 것이다. 잡초가 작은 씨에서 자라듯, 원망은 투털투털하다가, 신세타령하다가, 환경탓하다가, 형제탓하다가, 지도자탓하다가, 제도탓하다가, 교회탓하다가, 급기야 절대 해서는 안되는 ‘탓’을 하게 된다. ‘남탓과 남말’이 점점점 하다가 비판의 중앙선을 넘어선 것이다. 논리적으로 맞든, 틀리든, 원망에서 출발하는 비난과 뒷말은 좋은 것이 아니다. 혹여 내가 쓴 신앙의 칼럼에서 은혜보다는 내 의견이 섞인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하면서, 보다 따뜻하면서 온화한 글을 쓰기로 다짐하였다.
원망(怨望)에서 원(怨)은 뒹굴 원(夗)과 마음 심(心)이 합쳐졌다. 이리저리 뒹구는 것은 밤을 설치면서 고민하고, 걱정하고, 화를 참지 못하는 모양이다. 怨과 忠은 마음의 상태가 정반대다. 怨은 마음이 뒹굴뒹굴하면서 갈라진 상태이고, 忠은 마음이 중심을 잡고서 하나로 모여진 상태이다. 진정한 충성은 원망이 없다.
내 마음밭에서 잡초를 싹 뽑았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핸드폰이 놓여진 거치대가 사랑스럽게 보였다. 늘상, 핸드폰 반납에 대해 작은 불평을 토로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 어떤 제도에 대해서 불평을 갖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오늘 하루도 내 삶을, 내 마음을 깊게 들여다보면서, 원망을 뿌리로 둔 모든 것들을 제거해야겠다.
*** 오늘부터 신앙칼럼의 외부 펌을 금지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해당 칼럼이 확산될 경우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전달될 수도 있으니, 이곳에 와서 잘 분별하면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를 잘 아는 제 친구가 말하길, “창훈이 너 글은 좋은 것은 좋고, 간혹 아닌 것은 아니라서, 분별해서 읽어야겠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스스로 분별해서, 제 칼럼이 독자분들께 작은 보탬이 되길 바라며, 꾸준히 신앙칼럼을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민법 형법 천법
사람들은 법을 잘 모르고 산다. 기본법은 알아야 만사가 편하다. 그 중에서 민법과 형법과 천법을 핵심적으로 알고, 지켜야 신세가 편하다.
민법(民法)은 백성 민(民)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다룬 법이다. 사람끼리 알아서 지키는 법이다. 형법(刑法)은 형틀에 대한 법률로서 국가가 개입하는 법이다. 형법에는 반드시 ‘죄’가 있다. 민법에는 죄가 없고, 형법에는 죄가 있다.
철수가 민수에게 1백만원을 빌렸다. 빌리는 그 순간, 철수는 채무자가 되고, 민수는 채권자가 된다. 갚기로 약속한 날짜가 있는데 갚지 못했다면,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할 것이다.
철수와 민수가 떡복이를 먹었다. 값이 5천원이 나왔는데, 철수가 민수의 떡복이 값도 같이 계산했다. 민수가 돈이 없다면서,, 내일 주겠다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이때도 철수는 채권자가 되고, 민수는 채무자가 된다. 민수가 다음날 2500원을 갚으면, 약속을 지킨 것이다.
다음날 민수가 2500원을 안 갚았다. 철수가 민수에게 “왜 떡볶이값 안줘?”라고 했더니, 민수가 “내가 언제 떡볶이를 먹었어?”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래서 성질난 철수가 민수를 때렸다. 그 순간 폭행죄가 되며, 형법이 적용되고,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면 학교폭력에 해당되므로 학폭위(학교폭력위원회)가 소집되고, 가해자와 피해자는 각각 소명을 해야하고, 생기부에 기록이 된다. 이것이 형법이다. 돈을 갚지 않은 것은 분명 민수다. 그런데, 때린 것은 철수다. 국가는 돈을 갚지 않은 민수에게 벌을 주지 않고, 때린 철수에게 벌을 준다. 폭행은 국가에서 금지하는 행위여서 그렇다. 이것을 죄형 법정주의라고 한다. 형법에 규정된 죄(罪)만 죄로 인정하는 것이다.
천법에는 민법적 요소가 있고, 형법적 요소가 있다. 사랑은 민법적 요소가 강하고, 진리는 형법적 요소가 강하다. 사랑은 하나님과 1:1의 관계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청중속에서도 하나님은 개인별로 함께 하신다. 마치 햇살이 지구에 비추면 식물과 동물과 사람과 모든 만물이 햇살을 받듯 그렇게 각각 하나님을 만나면서 사랑을 나눈다.
반면, 죄를 범하면, 그 순간 형법으로서 천법이 적용된다. 형법은 죄를 지은 자에게 형벌을 주는 것이다. 죄인은 자유를 제한당하고,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다. 큰 죄는 사형으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사람의 몸은 그대로 있지만, 몸의 자유가 사라지고, 돈이 손해를 입는 것이다. 구속과 벌금형이 여기에 해당된다. 100만원 벌금형은 금액이 작지만, 100억원 벌금형도 있다. 천법도 이와 같다.
형법을 범하면, 국가가 개입한다. 그처럼 천법을 범하면, 흑암이 개입한다. 형법은 들키지 않으면, 판결이 나기전까지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해서 죄인이 아니다. 천법은 다르다. 범하는 그 순간, 즉시 형벌이 주어진다. 독을 먹으면, 1분도 되지 않아서 몸속에 바로 흡수되어 사망한다. 그와 같다. 독가스는 1분도 되지 않아서 온 몸에 퍼진다. 공기가 모든 세포에 배달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1분이다. 영적인 천법은 그 즉시 진행된다. 빛이 1초에 30만km를 가듯이 그렇게 빨리 적용된다.
죄를 범하면, 생명을 뺏거나, 자유를 뺏거나 경제를 뺏는다. 그처럼 천법을 범하면, 그 영혼이 감금된다. 생각이 마비된다. 마귀에게 끌려간다. 축복을 뺏긴다. 모두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어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어서 바벨론 포로생활을 했다. 죄를 지으면 식민지 치하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천법을 무섭게 지켜야한다.
천법중에서 창세기 법은 절대적이다. 또한 사명자를 원망하는 것은 해서는 안된다. 모세를 원망하다가 가나안에 못 갔다. 하늘은 사명자를 통해서 말씀을 선포하는데, 사명자를 원망하고 비판하다가 결국 악평으로 변질된다. 사명자는 선편(善便)인데, 선편을 나쁘게 봄으로 ‘악편’(惡便)이 된 것이다. 형법에서 육체의 생명을 뺏는 사형이 있듯이, 영혼의 사형인 지옥판결도 있다. 영혼이 사망으로 이미 결정된 악평자도 있다. 그런 악평자도 처음엔 투덜이에서, 불평이에서 시작하다가 점점점 죄를 즐기다가 악평의 감옥에 갇힌 것이다.
자기가 지금 어디에 속했는지 위치를 점검할 때는 “내가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로 판별할 수 있다. 판별식 D가 0이면 중근(1개), 플러스면 근이 2개, 마이너스면 근이 허근으로 없다. 말씀이 곧 판별식이다. 말씀을 준행하면, 그 사람은 말씀속에 속한다. 말씀을 귀히 여기면 그 사람은 말씀속에 속한다. 말씀을 멀리하거나 지키지 않고 말씀과 따로 생활을 하면 생명에
속하지 않는다. 말씀을 들으면서, “저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당된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생각도 잘못된 것이다. 책망의 말씀도 축복의 말씀도 “내게 해당된다”라고 들어야 말씀에 속한 것이다. 말씀은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전체를 깨우치는 하나님의 묵시다. 그래서 반드시 지켜야 생명에 속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