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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그의 말씀을 준행했다. 말씀을 준행하는 것은 말씀을 지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그가 만약 말씀으로 “빨래는 죄와 같다. 빨래를 쌓아두면 냄새가 난다. 회개는 매일매일 해야한다”라고 하면, 회개도 하고, 빨래도 하는 것이 말씀실천이다. 군대에서 “우향우”하면, 우향우를 하는 것이 명령의 준행이다. 사령관이 기준자를 향해 ‘우향우’라고 말해도, 전체가 ‘우향우’를 한다. 모두 해당되는 것이다.
‘뒷말금지’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여전히 뒷말을 하는 이유는 그 말씀이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다. 나는 그렇지 않고, 그렇지 않으려고 몸부림친다. “원망하지마!!”라고 했으면, 원망을 안하는 것이다. 투덜거림과 불만의 잡초가 불쑥 튀어나오면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나는 정녕코 그렇게 살기로 작정하였다.
오늘, 사회생활을 하면서, 세상사람들도 ‘뒷말문화’가 여전한 것을 알게 되었다. 30분 동안 내가 아는 어떤 사람에 대해 비판의 도마에 올리고서 이야기를 하는데, 마음이 상당히 불편했다. 결국 내가 입을 열었다.
“그 분에 대해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떤 관점인지 알겠지만, 제가 겪은 것으로는 니클라스 루만의 소통이론의 본질을 알게 해준 사건은 제게 정말 값진 사연입니다. 누가 뭐래도 제가 도움을 받은 것은 부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분이 없는 여기서 그 분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것을 제가 듣고, 제가 아는 그 분의 좋은 점을 침묵한다면, 그것은 그 분에 대한 인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있는 분들이 없는 곳에서 소중한 인연을 부인하지 않듯이, 여기에 없는 그 분에 대한 인연도 외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 내 머릿속이 더 이상 복잡하지 않았다. 말하고서 정말 잘했다는 뿌듯함이 샘솟았다.
기자교육 강의가 있었다. 누군가 전화가 왔다. 내게 어떤 정보를 주려고 사건을 설명하는 것인데, 나는 말을 끊음으로 귀를 닫았다. 죄는 그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다. 말씀대로 살면 만사가 편하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사람들은 비유를 통해 가려진 어떤 인물이 거론되면, 그 인물이 누구인지 추적하는 이상한 심리가 있다. 그것도 뒷말이다. 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각자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급선무다. 그래서 나는 내 칼럼의 방향을 완전히 바꿨다.
책망도 축복도 나는 모두 따를 것이다. 파란불도 빨간불도 모두 지켜야할 교통법이듯, 말씀에 편식은 없다. 책망은 모든 소망의 견책(譴責)이다. 책망도 내게 유익이고, 축복도 내게 유익이다. 책망과 질책은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인식은 ‘빨간불’이 없는 횡당보도와 같고,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의 비탈길 주행과 같다. 책망과 질책은 인생의 존재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반드시 빨간불에 멈추고, 파란불에 건너리라.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 하라고 한 것은 하고, 금지한 것은 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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