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行은 사람의 튼튼한 두 다리를 본떴다. 사람과 동물이 가장 크게 다른 것!! 직립보행이다. 직립보행은 곧 손의 자유를 허락했다. 손의 자유는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지혜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종족이 지능을 활용할 수 있도록 창조했기 때문이다. 행함의 위력은 곧 움직임이다. 날마다 일어나면, 수직의 삶을 살아간다. 걷고, 뛰고, 달리고, 이동하는 삶의 실천력을 행야야한다.
십자가(十字架)는 분명 죄의 형틀이다. 十은 숫자로 10이다. 근본은 가로와 세로의 결합이고, ‘덧셈 기호’이다. 더 근본은 10손가락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두 손을 반갑게 인사한다. 손가락 개수가 10개다. 五는 다섯 손가락을 본떴고, 十은 팔을 겹쳐서 표시한 것이다. 손은 곧 ‘나눔’의 뜻이다. 八(팔)도 두 팔을 본떴다. 각각 손가락 4개씩 8개를 의미한다. 팔은 나눔이다. 팔의 역할, 손의 사명은 주는 것이다. 付는 사람과 손을 합쳐서 물건을 준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파이팅’도 좋지만, 주먹을 움켜쥐는 것은 가지는 것인데, 움켜쥔 것을 상대에게 주는 것은 잃는 것인데, 주는 것이 곧 얻는 것이다. 주먹을 쥐면 상대와 싸우게 되고, 주먹을 펼쳐서 내 것을 주게 되면, 상대와 한 편이 된다. 十은 씨앗의 의미도 있다. 밭 전(田)은 씨앗이 뿌려진 땅(口)이다. 농부가 씨앗을 밥으로 먹을 수도 있지만, 먹지 않고 땅에 뿌려서 주니, 땅은 그 씨앗을 받아서 100배의 결실로 보답한다. 농부가 땅에 씨를 줬는데, 다시 결실로 얻는다. 주는 것이 얻는 것이다. 내 것을 얻으려는, 움켜잡으려는 주먹의 삶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내게 있는 것, 내 주먹에 들어있는 것을 상대에게 주는 손바닥의 삶을 살 필요가 있다. 손바닥이 보인다는 것은 투명한 삶이고, 내 진심을 모두 보여준다는 뜻이다. 마음을 보여주는 진정성이 바로 손바닥의 살이다. 주먹은 내 것은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十은 한문의 상형글자로서 열손가락의 두 손을 의미하고, 씨앗을 본떴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의 두 손이 오늘 하루 무엇을 하는지 유심히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두 손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도 손바닥을 모으고서 하나님께 간절히 바래야한다. 주먹은 상대가 주는 것을 받을 수 없다. 받을 때는 반드시 손바닥으로 받아야한다.
옛날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옛날 것중에 버릴 것이 있지만, 모든 것이 그렇지는 않다. 상투(常套)는 버릴 것이 맞다. 그러나, 옛날 선비정신은 지금도 동일하다. 부모님의 사랑은 지금도 귀하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 동이족이 남긴 위대한 유산 한자는 지금도 사용되는 최첨단 문자다. 오래된 것이 무조건 안 좋다고 생각하면, 태양과 지구에 살 필요가 없다. 태양은 태양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오래되었는데도 그 기능은 지금 살아서 힘을 발휘한다.
친구(親舊)는 친밀한데, 오랫동안 친한 것이다. 舊는 옛날 구(舊)이다. 오랫동안 살게되면 정(情)이 붙는다. 情은 마음 심(心)과 푸를 청(靑)의 합성이고, 푸를 청(靑)은 풀을 본떴다. 푸르다는 것은 ‘풀이다’는 것으로, 풀색이 푸른 색이다. 붉은 색은 불색이다. 흑색은 흙색이다. 풀이 자라는 것은 씨앗이 뿌려지면서 가능하다. 사람과 사람이 정이 붙는 것은 10년, 20년 서로 고생하고, 눈물로 역경을 겪으면서, 고통을 함께 이기면서 생기는 감정이다.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릴 수 없다고 했다. 하갈이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사라의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하갈은 하갈일 뿐이다. 아브라함이 살기가 힘들어서 사라를 데리고 이집트에 내려갔다가, 그때 데리고 온 것이 하갈이다. 사라와 함께 고생하다가 몸종으로 얻은 것이 하갈이니, 하갈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겪은 고통과 눈물의 사연을 알 수가 없다.
바위틈에서 자란 소나무가 정말로 귀해서 캐면, 살아남을 확률이 적다. 바위틈에서 성장하고 있는데 캐내서 그렇다. 정든 것을 끊는 것은 인맥을 끊는 것과 같다. 정든 것은 편한 것이고, 몸에 맞는 것이다. 정든 것이 불법이면, 그것을 끊어야하지만, 정든 것이 옳다면 그것을 귀하게 간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골동품은 그 가치가 상상 이상이다. 고려청자는 고려시대에만 만들 수 있으니, 지금 도자기 제작 기술이 더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고려청자의 가치를 따라갈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