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본질은 뇌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사랑의 깊은 비밀은 인류문명의 영원한 숙제다. 가장 작은 사회는 곧 가족이다. 창세기에 나와있듯이, 가족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짝을 이뤄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곧 부부다. 사랑은 과연 무엇인가?
사랑을 하는 이유, 즉 사랑의 행위를 하는 이유는 쾌감 때문이다. 쾌감이 없다면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이다. 쾌감(快感)은 즐거운 느낌이다. 전제가 그러하면, 즐거운 느낌을 준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의 행위도 다양하다. 가볍게는 스킨쉽, 키스, 애무 등등이다. 그렇다면, 악수도 사랑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움직이는 모든 것이 예술이다”는 그의 말씀이 있다. 생활예술을 말하며, 자신의 움직임과 사회의 움직임까지 모든 변화가 예술임을 의미한다. 예술가의 작품만 예술이 아니다. 집에서 밥을 짓는 어머니의 정성도 예술이다. 예술작품이 밥과 반찬으로 표현된다. 날마다 어머니는 ‘요리의 예술가’이며, 식구는 예술을 만끽한다. 예술도 결국 사랑의 범주에 들어간다. 사랑을 이성행위(異性行爲)로 국한다면, 사랑의 개념이 너무 축소된다.
나이가 들면 정력이 감퇴한다. 정력이 감퇴하면 과연 사랑의 부부가 안되는 것일까? 비아그라를 먹어야 사랑을 입증할 수 있을까? 사랑의 개념을 잘못 인식하면 이러한 오류가 발생한다. 사랑의 행위조차 뇌의 신경을 자극하기 위해서 한다. 성적 지체가 만약 힘을 잃으면 뇌신경 전달도 불가능하니, 그 행위를 할 수가 없다. 느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뇌가 모든 지체의 신경망을 통솔한다. 뇌가 느끼므로 지체도 존재한다. 결국 본질은 뇌에 있다.
군대에 처음 들어가면, 하사가 제일 높아 보인다. 왜냐면 하사관이 훈련병을 통솔해서 그렇다. 자대배치를 받으면 상급자인 일병이 제일 높아보인다. 일병이 직접 모든 것을 다스려서 그렇다. 군대에 점점점 익숙해지면 소대장이 보인다. 소대장은 다이몬드 1개다. 점점점 계급이 높아져서 5대 장성에 포함되는 병장이 되면, 사령관의 존재도 알게 되고, 대대장도 알게 되고, 그 즈음 사회의 눈까지 떠져서 군대는 그저 정권의 일부에 속함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은 정치조직이며, 그 중에 극히 일부가 군대다.
우주속에 은하수속에 태양계속에 아주 작은 행성 지구가 있고, 그 지구안에서 대한민국의 어느 구석에 먼지만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우주의 상대적 크기로 본다면 인간은 미세먼지보다 더 작은 ‘미세한 미토콘드리아’와 같다. 과연 그렇다. 인간은 우주의 상대적 크기로 원자보다 더 작은 존재다. 뇌의 모든 신경망에서 성적 지체가 차지하는 비율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상대적 크기처럼 미약하다. 지구에 생명이 존재한다고 하여도 우주의 크기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처럼 뇌가 모든 신체를 신경망으로 다스리고, 그 중에 일부가 성적 지체이니, 사랑의 범주를 뇌의 신경으로 해석해야 삶이 보다 윤택해진다.
이성의 사랑만을 고집하는 자는 뇌가 성적 지체에 예속된 것으로 간주하는 자이다. 얼마나 미련한 왕권주의 체제인가? 옛날 왕권체제는 권력이 오직 1사람에게, 1가문에게 예속됐다고 봤다. 권력은 결코 그러할 수 없는데 그렇게 간주한 것이다.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로서 권력이 모든 사람들에게 속한다고 법으로 정한다. 그처럼 뇌신경은 신체 전체를 다스리며, 특히 뇌는 뇌 자체도 다스린다. 뇌가 뇌를 다스린다는 것은 곧 생각의 신경망을 의미한다. 눈을 감아도 뇌는 상상력으로 느낌을 갖고, 불현 듯 떠오르는 영감의 쾌감은 심장을 고동치게 한다. 그것도 사랑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보다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려면, 첫째 사랑의 개념을 확장해야한다. 사랑을 편식하면 절대로 안된다. 모든 것이 곧 사랑이므로, 천법으로 엄격히 금지하는 이성간 사랑과 동성간 사랑과 자위행위를 탐할 이유가 전혀 없다. 부부간 이성행위는 천법이 허락하여도, 바람을 피는 것이 설령 현행법에서 간통죄 폐지로 범죄가 아니라고 하여서 양심적으로, 신앙적으로 면책받을 수는 없다. 권태를 이기는 지헤는 사랑의 개념을 확장하는 것이다.
사랑을 하면 표출한다. 그처럼 나는 글을 표출하므로 사랑한다. 모든 예술은 표출이다. 그래서 예술도 사랑의 행위다. 사랑을 하면 생명이 탄생한다. 그처럼 예술작품은 작가의 사상을 담고, 닮아서 표출된 생명력을 가졌다. 에술작품이 곧 사랑의 표현이며, 형상이다. 사랑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가족공동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그것으로만 세상이 움직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교육체계만 보더라도 교사들이 사랑의 마음으로 교육하지 않는다면, 과연 학생들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을까? 남의 자식들이지만, 지식이 자랄 수 있도록 늘 신경쓰는 모든 일이 곧 사랑의 범주에 들어간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즐겁지 않다면 과연 왜 그 일을 하겠는가? 지금 내가 즐거운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나는 작가로서 그러하다. 모든 인생은 전문가의 직업으로 그 사랑에 빠진 것이다. 따로 국밥은 없다.
사랑의 범주를 확장하면 매순간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사랑의 범주가 너무 좁으면 날마다 곤고하다. 이성간 사랑은 힘껏 불타는 모닥불처럼 솟았다가 금새 시들기 때문이다. 반면, 사랑의 범주를 확장하면 매순간 행복하다. 아내가 남편을 위해 요리를 만드는 행위도 사랑의 선물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삶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고 사회를 따뜻하게 한다.
이성의 사랑은 서로 줌으로 서로 갖는다. 그 작은 지체가 그러하다면, 나눔이 곧 사랑인 것이다. 나눔봉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기쁨이 참으로 충만하다. 쾌감이 극에 달한다. 나눔을 통해서 뇌가 즐겁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해 이해와 관용으로 포용함으로 결합의 협력을 한다면 그것도 사랑의 문을 여는 것이다. 사랑은 협력이며, 포용이며, 관용이며, 용서며, 다름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랑은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행위인 것이다.
창세기에서 에덴동산에 거주하는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되 금지한 열매가 2가지였다. 모든 열매가 몇가지인지 모르지만 수백만가지보다 많을 것이다. 먹지 못하는 열매는 0.0001%보다 작다. 금지된 열매가 쾌감을 준다면, 허락된 열매도 쾌감을 주는 것이 상식이다. 모두 열매의 범주에 속해서 그렇다. 이와 같이 사랑의 범주는 확장해야 사는데 불편이 없다.
*** 해당 칼럼은 정명석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쓴 감동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