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내용은 작가의 개인적 의견이니, 확대해석을 금지합니다. / 편집자주
[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교역자(敎役者)는 교회의 사역을 맡은 자이다. 다른 종교와 다르게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교리로 삼고 있다. 교육(敎育)의 종교가 곧 교회요, 기독교다. 나는 1999년부터 많은 교역자를 거쳤다. 종로교회에서 K교역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교역자들은 나와 친분이 없었다. 나는 늘 그것이 의문이었다. 이혼을 한 후, 고등학교 시절 교역자였던 자가 나의 교역자가 된 적도 있었는데,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삭막함, 사랑없는 진리가 얼마나 기괴하고 해골스러운지 그때 깨달았다.
새벽 말씀을 들으면서 나를 거쳐간, 지금 접하는, 나와 만났던 목회자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그 중에 누가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다가왔는가? 그 누가 내게 긍휼의 말씀으로 왔는가? 어떤 목회자들은 목회사역을 하는 내도록 나와 진지한 만남을 한 적이 단 1번도 없었다. 그 목회자는 파견을 받았으나, 내게는 목회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괴팍한 성격은 아닌데, 왜 그럴까? 나는 이것이 늘 고민이었다. 내가 너무 과잉반응인가?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교회가 삭막해지는 것은 정감이 없어서 그렇다. 가령, 설교녹음 금지 정책을 펼치는 것은 좋다. 설교녹음 금지 정책을 어떻게 실현하느냐가 중요한데, 그것에 몰두하다가 성도들에게 지속적 피해를 준다면 그것이 옳을까? 핸드폰 반납을 하라고 장승처럼 무섭게 서있는 교회입구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화나게 할 수 있다. 과연 교회 초입이 그러한 곳인가? 좀 더 따뜻하게 해야 마음이 풀어지고, 오고싶고, 기억나는 것이다. 오늘은 생각이 무척 깊었다. 왜 교회가 갈수록 차가워지는 것일까? 내가 왜 교회를 차갑게 느낄까, 나만의 문제인가? 예배가 시작되면 예배부장은 가장 먼저 그리스도의 진리가 선포되도록 모범을 보여야할텐데, 핸드폰이 혹시 있는지 이곳저곳 감시자로 돌아다닌다. CCTV가 따로 없다. 교육은 왜 존재할까? 문화적으로 교육을 하고 신뢰를 기반으로 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5개월이 지나도록 그것을 못했다면, 누구의 문제인가? 요즘 누가 설교녹음을 하는가?
부서와 교역자간 1달 1회 만남을 하자고 건의를 해서, 실제로 진행이 됐는데, 딱 1번만 진정성있게 했고, 나머지는 건성으로 해서, 나는 폐지를 주장하였다. 알고보니, 안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부서와 1달에 1번 만나는 것도 안할 정도니, 도대체 성도들과 교류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교역자는 누구를 위한 교역자인가?
오늘, 교역자를 향해 날카로운 교육이 있었지만, 나는 별 기대 안한다. 그러한 교육은 오랫동안 있었다. 그러나 변화된 교역자는 못 봤다. 이번에도 그럴 확률이 높다고 나는 추측한다. 교육의 효과는 변화다. 단 1명의 교역자라도 그의 교육이 마음에 꽂혔다면, 성도들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무관심했고, 감사가 부족하고, 그리스도의 심정을 전하지 못했는지, 회개부터 할 것이다. 만약 정말로 깨닫는 교역자가 있다면, 예배 시작 전에 교회 입구에서 맞이활동을 할 것이다. 예배가 끝나면, 제일 먼저 본당 밖에서 깍듯이 성도들을 배웅할 것이다. 감동은 사소한 변화에서 흘러나온다. 교역자가 성도를 진정으로 대하는데, 어떤 성도가 감동을 받지 않을까? 단지, 눈물로 호소하여 기도했던 내용이 있었는데, 오늘 교육으로 답을 받았다. 참으로 성령님께 감사를 드릴 따름이다.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
** 교역자는 맨위에 있는 사람만 살피지 말고, 맨 밑에서 말없이 수고하고 충성하는 자들도 알아주고, 칭찬해주고, 격려해줘야한다.
– 새벽말씀 요약노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