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신앙(信仰)은 믿을 신(信)과 우러를 앙(仰)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것이 곧 신앙(信仰)이다. 신학(神學)은 하나님을 배우는 학문이다. 신앙(信仰)에서 믿을 신(信)은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의 합성이다. 말씀은 곧 진리를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행하면서 생긴다. 믿음은 마음속에 구름처럼 떠오르는 것이 아니고, 행위의 땅에 깊게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사람과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의 말을 지키면, 그 사람과 신뢰가 쌓인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과 하나님’의 약속이다.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행하면, 그 말씀을 행함으로 사람과 하나님의 믿음이 점점점 성장한다. 신앙(信仰)은 말씀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것이며, 하나님이 말씀한 방향으로 인생이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신앙의 길을 벌써 30년째 걸어오고 있다. 처음 성경공부를 했을 때 1달, 2달을 몰아붙이면서 내게 깊은 진리와 시대 사명자에 대해 알려주려고 주변에서 안달이던 사람들, 그들 중에는 신앙을 포기한 자들도 있다. 과연 신앙이 1달, 2달, 3달의 결과물일까? 아니다. 신앙은 평생을 두고 달려가야할 마라톤과 같다. 정부가 예산을 편성하듯 10년 프로젝트로 신앙의 길을 설계하는 안목(眼目)이 필요하다.
오늘 주일말씀 제목은 “정녕코 이루었다”이다. 과거형의 동사로서, 완성의 종결어미 ‘었’이 사용되었다. ‘이룬다’도 아니고 ‘이루었다’ 또는 ‘이뤘다’였다. 행동과 경험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 ‘선언적 명제’다. 과연, 하나님은 인류문명 가운데 위대한 종교 프로젝트를 “이루었다.” 하나님이 성공할 수 있는 근본배경은 ‘조급함’을 배제한 ‘장기 프로젝트’에 있음을 모두 알고 있다. 6천년동안 끊임없이 인류문명을 상관하고, 간섭하고, 다양한 지혜와 발달의 기술로서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구약-신약-성약의 3단계로 이어지는 종교 프로젝트는 이제 6천년을 지났고, 마지막 1천년이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은 1천년을 기본단위로 종교역사를 펼치셨다. 구약 4천년, 신약 2천년, 성약 1천년이다. 시간의 설계도는 베드로후서에 나와 있다.
베드로후서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만드셨는데, 최소한 하나님의 사상을 1/100을 닮는다면, 10년의 장기 프로젝트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루살이처럼, 혹은 한달살이처럼, 혹은 1년살이처럼 인생을 살아간다면 농사짓는 수준에 머물게 된다. 농사짓는 수준은 산업혁명과 정보혁명과 국제사회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요즘 농사짓는 농부들도 10년 뒤를 내다보면서 상품을 가공해서 산지직송 제품을 도시에 판매하려고 판로를 개척한다.
100m 달리기처럼 하루만 신경쓰는 사람과 마라톤처럼 10년을 설계하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차원과 방향과 속도가 전혀 다르다. 마라톤을 뛰는 사람은 꾸준히 속도를 유지하고, 100m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순발력으로 최선을 다하지만, 그 다음은 지쳐서 쉰다. 인생과 신앙은 마라톤의 긴 호흡이 필요하다. 나는 10년동안 한문과 글쓰기에 매진하였고, 지금은 한국에서 독보적인 존재로서 내 역량을 발휘하고 있으며,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미래 10년을 새롭게 설계중이다.
하나님의 절대성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 중에서 이사야서 46장 11절의 예언은 인류를 향한 대망의 언약이다. 이 예언은 이사야서 11장과도 연결된다. 곧 메시야를 보내주시는 약속이다. 메시야가 인류가운데 나타나면, 봄이 오듯 모든 인류의 소망이 이뤄지고, 평화가 시작된다. 메시야는 곧 하나님께서 이 땅에 출현하는 상징의 사명자이다.
이사야서 46:11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동방에서 독수리’는 ‘하나님의 모략을 이룰 자’와 같고, 시대의 사명자를 의미한다. 구약은 모세, 신약은 예수님, 성약은 성약의 주인이다. 하나님은 정녕코 그 약속을 이루셨다.
‘동방’은 유럽에 대해 이스라엘이 동방에 해당된다. 2천년전 유대교가 유럽문명에 대해 동방이었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유럽문명에 빛이 될 인물이었는데, 유대인들이 십자가에서 살해하면서, 큰 뜻을 원대하게 펼치지 못하였고, 유대교는 유랑하는 종교가 되었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로마로 건너가서 결국 로마에 교황청이 들어서면서 중세의 중심종교가 되었다. 동방의 독수리를 보내어 종교역사의 뜻을 정녕코 이루셨다. 신약은 예수님의 육신이 죽임을 당해서, 육신없는 상황에서 그 차원에서 완전하게 이룬 하나님의 뜻이었다.
반면, 성약시대 1천년 종교역사 프로젝트는 완벽하게 뜻을 이루셨다. 성약시대에서 ‘동방’은 곧 극동아시아로서 ‘한반도’를 의미한다. 2천년 전에는 이스라엘이 종교의 중심국이었고, 지금은 기독교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한국이 기독교의 중심국이다. 지구 전체를 본다면 동방은 아시아이며, 가장 동쪽은 한국이다.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조선(朝鮮)의 국호도 아침의 고운 나라, ‘굿모닝’의 의미다. 아침은 곧 동쪽이다. 독수리는 새들의 왕이다. 새는 땅과 하늘을 매개하는 존재로서 날개는 곧 종교적 지도자를 상징하며, 공중의 독수리는 곧 지구의 왕을 의미한다.
구약에는 모세를 통해서 그 뜻을 이루셨고, 신약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 뜻을 이루셨고, 성약에는 시대 사명자를 통해서 정녕코 뜻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뜻은 곧 우주와 인간의 창조목적 뜻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인류문명에 시대 사명자를 반드시 보내서 그 시대마다 하나님의 뜻을 정녕코 이루셨다. 이제 남은 것은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이다. 하루살이처럼 의미없이 뜻없이 살 것이 아니라, 10년을 내다보면서 긴 안목으로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진리를 통해서 살아가야할 것이다.
오늘 말씀을 듣는데, 설교시간에 내 옆에 앉은 사람은 정녕코 졸았다. 예배시간 내도록 잠을 푹 잤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감탄하면서 박수를 치면 잠결에 박수를 수십번 쳤다. 연세가 있는 중년의 남자가 그러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없이 살아가는 낙엽같은 인생이 얼마나 한심한지 정녕코 깨달았다. 남들이 하니까 박수를 치는 것, 과연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 잠이 오면 벌떡 일어나서 서서 듣던지!!!
그렇다. 나는 마라톤을 하듯이 길게 내다보고서 신앙을 살아갈 것이다. 정녕코 그러할 것이다. 1999년부터 10년동안 그러했고, 또 10년을 그러했듯이, 앞으로 10년을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정녕코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