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시대가 달라졌다. 옛날에는 유교적 방법으로 지식을 한꺼번에 주입하는 상명하달식(上命下達式) 교실강의가 유행했다면, 요즘은 체험학습으로 학생들이 질문하는 교실이 유행이다. 옛날에는 침묵으로 듣는 교육이 유행했다면, 요즘은 대화로 묻는 교육이 유행한다. 시대가 완전히 달라졌다. 말씀 강의법도 그래서 달라져야한다. 나는 실제로 기자교실을 하면, 50분 교육중에서 10분 정도만 떠들고, 40분은 학생에게 나눠준다. 학생이 말하게 하는 교육법, 이제는 그러한 시대다.
“정명석 선생님은 군림하지 않고, 함께 어울리는 지도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나눔과 베품을 알고, 모든 사람들을 챙기는 지도자인 것을 보았어요. 지시하지 않고, 함께 뛰며, 함께 운동하며, 함께 땀을 흘리니까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르고, 존경하는 것을 느꼈어요. 그 사상이 무엇인지, 그 교육철학이 무엇인지 정말로 배우고 싶어졌어요.”
– 말씀 듣는 신앙의 초신자
어제 나는 신입생에게 깊은 것을 배웠다. 배움은 신입생을 통해서도 얻는 것이다. ‘정명석 목사님은 군림하지 않고 어울림을 아는 지도자’라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설명하는 신입생의 관점을 들으면서, 강의의 본질은 성령님께서 행하심을 더욱 믿게 되었다. 단지, 사람은 모를 뿐이다. 그 신입생은 내게 몇가지 정말로 중요한 내용을 알려줬다. 그녀는 사실 교육의 달인이다.
그 신입생은 5번 강의를 들으면서 크게 변화했다.
첫 번째 강의는 생명의 큰 위험을 겪은 날, 들었다. 지금도 나는 그 때 사건과 강의가 잊혀지지 않는다. 성령님이 그때 함께 있던 강사를 잡고서 행했다. 그날 인본주의적 사상이 깨어지고, 신본주의로 각도가 바뀌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두 번째 강의는 월명동 약수샘 동굴앞에서 있었다. D대 디자인과 교수님이 20분 정도 간증 강의를 했는데, 그날 엄청난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 ‘고정관념의 고집과 자기주관의 아집’으로 뭉친 인물의 변화된 간증으로서, 그 신입생은 오랫동안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본 듯 하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말한다. 강의 목적은 ‘사명자를 깨닫는 것’이라고. 정녕 그러하다. 사명자를 깨닫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의미인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있다. 그 지식이 누구에게 유효한가? 깨달음은 지식의 전달이 아님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고, 사상, 생각, 인식, 고정관념, 습관, 철학의 변화가 없다면 깨달음도 없다. 지식으로 표현된, 진실한 말로서 고정관념의 껍질이 녹는 것이다. 진실한 간증은 맑은 거울을 보여주는 것과 같아서 깊은 깨달음을 선물한다.
세 번째 강의는 월명동 초입에서 있었다. 3번째 강의도 정말로 신비했다. 월명동 안내소를 넘었을 때, 어떤 남자 목사님이 근처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그 목사님은 월명동 가이드로 활동하던 분이라서 사전 약속이 없었지만, 정중히 가이드를 해줄 수 있는지 여쭙자,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문턱바위에서 30분 넘게 설명을 들었다. 월명동의 그 많은 바위들이 있는데, 우리는 문턱바위에서 모든 시간을 사용했다. 그때 그 교육이 신입생의 인식관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문턱바위는 곧 기초학문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교육법이기도 하고, 정명석 목사님께서 늘 교육하는 실천강령이다. 신앙의 문턱바위, 신앙의 출발점은 ‘말씀과 행함’이다. ‘말씀과 행함’이 있어야만 문턱을 넘어서는 것이다.
마태복음 7/24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네 번째 강의는 정명석 목사님과 만남, 그 이후에 있었다. 그 신입생은 건강이 약해서, 기도를 받기를 원했는데, 그날 기도를 해주지 않으셨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가려고 천막에 있었는데, 누군가 숨을 몰아쉬면서 뛰어왔다. 그 사람이 말하길, “방금 선생님께 월명수를 마시고, 병이 나았던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이 사연을 빨리 가서 000 신입생에게 알려줘라, 월명수를 꾸준히 마시고, 월명동에 자주 오라고 하셨다”고 전해줬다.
마라톤의 유래가 된 그 사건처럼 숨을 헐떡이며 그의 간절한 마음을 전해준 누군가의 말이 그 신입생에게 기도가 되었다. 기도(祈禱)가 무엇인가? 사람들은 그가 손을 높여 기도해야 기도가 실현된다고 믿는 경향이 짙다. 기도는 형식을 초월해 마음이 전달되는 것이다. “월명수로 병이 치료된 사연을 전해줘라”고 사람을 보낸 것이 이미 기도였으니, 그 행위의 기도가 그 신입생의 마음을 확 변화시켰고, 그 신입생은 정명석 목사님이 자신의 마음을 알고, 파악함을 인지하면서 마음의 자세를 다르게 가지게 되었다.
생명이 수료하는 것은 영적인 태아가 탄생하는 것이다. 육적인 생명인 태아가 탄생할 때, 10달 동안 산모는 꼼짝달싹을 못한다. 산고(産苦)와 해산의 고통은 10달 내도록 진행되니, 과연 성령의 애달픔은 생명을 향한 간절함이리라. 내가 본 것을 고백하면, 생명이 인식관의 껍질을 벗기까지 성령께서 사람과 사건을 통해서 말할 수 없는 몸부림으로 행하시니, 과연 그러한 애씀이 성령이 친히 생명을 잉태한 산고의 고통이리라. 상황이 이러할진대, 말씀을 전함에 있어서 얼마나 진실되게 해야할까?
다섯 번째 강의는 그의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행됐다. 사람들은 지식의 교육을 해야만 그것이 강의라고 생각한다. 강의목적이 무엇인가? 그를 깨닫는 것이다. 깨달을 각(覺)은 배울 학(學)과 볼 견(見)이 합쳐졌다. 봄(see)으로 배우는 것이 바로 깨달음의 시작이다. 본다는 것은 각자의 인식관으로 자세히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와 악수하는 것이 크다고 생각한다. 악수(握手)는 손을 잡는 것이다. 손을 잡으면 순간이고, 마음을 붙잡으면 몸이 잡힌다. 손보다 마음을 잡아야한다. 마음을 잡으려면 그 마음을 이해하고, 감동을 줘야한다. 강의의 달인은 ‘경청’을 통해 상대와 교감하는 강의를 한다.
사회는 사회에서 일할 다양한 지도자를 만들려고, 최소 12년의 긴 교육시간을 투자한다. 초등학문 6년, 중등 3년, 고등 3년으로 12년이다. 신앙공동체는 영원히 살아갈 천국의 삶과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을 함께 교육해야하는데, 과연 지식의 전달이 영혼을 온전히 만들 수 있을까? 모태 10달, 지태 100년이듯, 최소 10달의 긴 기간을 통해서 생명을 보살피면서 온전한 신앙인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빛과 소금처럼 살려고 노력한다”라고 말했더니,
그 사람이 내게 물었다. “빛과 소금이 무엇인지 아세요?”라고.
내가 “깊은 의미를 모르겠어요. 알려주세요”라고 대답했다.
그 사람이 내게 말했다.
“소금은 맛을 내는데, 소리없이 말없이 스르르 녹아서 맛을 내죠. 빛도 모든 물체가 보여지도록 자신은 형체가 없죠. 안보이는 빛이 있어서 물체가 보이는 것이죠. 소리없이, 말없이, 모습없이, 드러내지 않고, 생색내지 않고 돕는 것, 그것 아닐까요? 상대를 위하는 마음, 진실한 사랑, 아낌없는 나눔, 그것 아닐까요?”
나는 긍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