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방송(生放送)은 ‘살아있는 보낸자’의 뜻
– 말씀 녹음 금지보다 말씀의 뇌 녹음이 시급하다
[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구약에 “시체가 무덤에서 살아난다”는 예언이 있다. 육체의 시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죽은 자가 말씀을 들음으로 새롭게 살아나는 것이다. 어제 수요예배 말씀에서 정명석 목사님은 “살아난 것만 부활한 것이다. 부활은 죽기 전 상태로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을 전하셨다. 그 말씀은 생각의 망치를 내게 던졌다. 섭리의 죽기 전 상태는 곧 1999년이다. 1999년부터 무덤기간에 들어가므로 그러하다. 죽기 전 상태, 즉 1999년 그때의 시점으로 부활!!! 르네상스!!!
J은 정녕코 죽기 전 상태로 복귀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슬픔의 역사였다. 그래서 J처럼 제자들도 십자가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다.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고,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하셨다. 육체로도 다시 살아나셨다면, 죽기 전에 하셨던 복음사역을 정녕코 하셨을 것이다. 십자가 사건 이후 J이 말씀을 전하신 사건은 없다.
J은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이 유대인의 메시야를 그렇게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지금 시대도 그렇고, 인생도 그러하다. 자신의 신앙을 죽이는 것은 곧 자신의 태만이며, 자기중심의 신앙이다. 최근 나는 성경공부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진실로 ‘자기중심적 세계관’으로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회개하였다.
1999년 이후, IT와 인터넷이 극적으로 발달하였다. 그 때는 PC통신 시대였는데, 정명석 목사님은 자주 “새벽에 전한 말씀을 모두 동시에 듣는 시대가 열릴 것이다. 잠언을 전하면 바로 전달되는 시대가 열릴 것이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이 예언이 되어 현재 실현되었다. 생방송 새벽말씀이 그렇고, 카톡 사연편지가 그러하다.
죽은 자가 부활한다면, 죽기 전의 상태로 살아나는 것이다. 과연 그러하다.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에서도 식물인간처럼 여주인공이 13년을 누워 있다가 깨어났다. 나이는 30인데,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서 17살의 지능과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30살 여고생으로 활동한다는 내용이다. 죽다가 다시 살아나면, 죽기전 그 상태가 되는 것이다.
1999년 그때 우리는 PC통신 시절로서 노트필기의 달인이었다. 노트필기는 각자 개성의 필체로서 스스로 말하게 하는 담대함을 선물했다. 보라매에서 운동말씀을 듣고 노트필기를 한 지도자는 부서원들에게 전화로 핵심 요약말씀을 전해줬다. 그렇게 전화를 하면서 서로와 서로가 연결되었다. 얼마나 끈끈한 동지애였던가!!! 신앙의 동역자였던가!!! 사랑의 공동체였던가!!! 말씀과 사랑이 일체된 행복의 감동이었다. 지금 그런 모습은 퇴색되었다.
누군가 내게 “새벽말씀 신앙칼럼은 선생님 허락을 받고 올려야하지 않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새벽말씀을 나가지 않은 성도들이 상당수인데, 그런 성도는 어디서 말씀을 확인할 수 있나요?”
그가 말하길, “교역자에게 전화로 물어보면 알려주지 않을까요?”라고 대답했다. 교역자 책임인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정명석 목사님의 새벽예배 첫날 참석하지 못했다. 그날 새벽말씀을 확인하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거의 전화를 받지 않거나, 보완상 전해줄 수 없다는 뉘앙스였다. 아!!! 이 무참함이여!!! 과연, 우리는 살아있는가!!! 보다 무엇이 중요한가!!!
누군가 내가 쓴 신앙칼럼 수백개를 비공개하도록 요청했다. 내가 그 정책을 따랐다. 그런데, 그가 내게 말하길, 악평자들은 수천개의 글을 쓰는데, 우리는 홍보하는 글에는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었다. 그를 증거하고, 섭리를 선평하는 수백개의 글을 보안의 이유로 덮으라고 하면서, 악평자들은 수천개의 글을 쓴다고 내게 말을 하니, 도대체 나는 어찌 하라는 것인가!!!
나는 어제 그가 전하신 말씀, “부활은 죽기 전 상태로 살아나는 것”을 아멘으로 받아드렸다. 1999년, 그때 우리는 진리로 뜨거웠고, 전화기를 붙잡고 말씀을 전해주려고 안달이었다. 노트를 펼쳐서 말씀을 전하면서 우리는 끈적한 전우애로 뭉쳤다.
나의 진실한 신앙칼럼을 쓸 때마다 나는 또 그들이 내리라고 하면 어쩌나 늘상 걱정이다.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말씀에 따라 맡기고 글을 썼다. 어제는 누군가 내게 카톡 문자를 보내오길, “국장님 보내주신 칼럼을 읽어주니 아이들에게 재교육으로 정말 유익합니다”라고 전해왔다. 아~~ 내가 잘하고 있구나!! 다시 마음을 먹었다.
생방송 생중계는 유튜브에서 자주 활용된다. 실상 스마트폰은 지금 현재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신문만 하더라도 어제 신문은 쳐다도 안본다. 실검은 네이버의 메인을 장식한다. 지금 현재가 사람의 살아가는 핵심이다. 생중계 생방송을 지금 볼 수 있도록 스마트폰으로 보내주시겠다고 어제 정명석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멋진 생각의 전환이시다. 과연 우리 섭리는 기독교가 부러워할 최첨단 공개방송으로 문화예술을 꽃피웠다. 보안(保安)도 중요하다. 보안 때문에 말씀전파가 막히면 그것은 누구 책임인가? 보안 때문에 홍보가 막히면 그것은 누가 하나? 보안 때문에 모두 침묵하면 누가 세상을 향해 외치나?
생방송(生放送)의 다른 이름은 살아있는 보낸자이다. 생중계(生中繼)의 다른 이름은 살아있는 메시야이다. 방송(放送)은 보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생방송은 살아있는 보낸자이다. 중계(中繼)는 가운데서 잇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을 잇는 중보자이다. 메시야는 곧 미디어(중보자, 연결자)의 개념이다. 생중계(生中繼)는 곧 살아있는 메시야이다. 나는 생중계와 생방송의 본질을 그렇게 믿는다.
보안을 위해 우리는 기꺼이 핸드폰을 반납한다. 말씀 녹음 금지보다 더욱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말씀의 뇌 녹음이다. 말씀을 뇌에 기록하고, 말씀을 노트에 기록하는 것은 매우 매우 중요하다. 보안을 위해 핸드폰을 반납하는데는 혈안이 되면서, 정작 말씀을 집중해서 듣는데는 교역자들이 수수방관이며, 말씀을 듣지 못하는 성도들에 대해서는 어떤 대책도 없다. 과연 1999년에 어떠했는가? 말씀과 말씀 상고의 르네상스가 일어나야할 시점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