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가는 길
창밖으로 내다보는 풍경은 무더위 보다는 평온한 저녁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길을 향하고, 나의 버스는 교회를 향한다. 오늘도 상당한 땀방울을 흘리면서 노동의 댓가로서 보람을 얻었다. 희망은 뭉게 구름같고, 지금 내가 얻은 소중한 보물을 마음에 품는다. 신앙은 실물보다 더 실체이다. 죽음이 실체로 육신에게 일어나듯이, 무형의 보물은 실제로 존재한다.
사람의 모순은 죽음 이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노후복지를 위해서 각종 보험(保險)을 들고, 교통사고를 대비해서 자동차 보험을 들며, 생명보험을 들어서 살아남은 가족의 장래까지 걱정한다. 생명보험은 사실 사망보험이다. 모든 보험은 살아있는 기간까지만 적용된다. 어떤 보험사도 죽음 이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죽음 이후는 누가 보장할까?
종교는 그저 마음의 위로를 받기 위함이 아니다. 사실 내가 지금 타고 가는 버스가 생각지도 못하는 상황을 직면할 수도 있다. 안전벨트를 하지 않고, 노트북을 펼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게 발생할 충돌은 분명 노트북의 고장을 유발할 것이 분명하다. 충돌이 만약 예상보다 크다면, 생명의 위험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사건이며, 그렇게 인생은 죽고, 죽음을 모면하고, 모면했다가 다시 죽게 된다. 인생은 그래서 유한하다.
유한한 인생이 무한하게 살길 원하면서도 그 한계가 분명하게 정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절대로 무감각하면 안된다. 언젠가 인생은 죽음을 직면한다. 아무리 재밌는 드라마도 최종회가 방영되듯이 인생도 그 수명에 마침표를 찍고, 살아남은 유가족들의 슬픔을 요청해야한다. 자신의 장례식을 직접 지켜볼 고인(故人)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장례식이 진행될 때, 과연 고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입관식이 진행되는 그 순간에 고인(故人)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사람이 죽으면 진정 무덤에 묻히는 것일까?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화장을 해서 강물에, 바람에 뿌려달라고 유언을 남긴다. 자연속에 뿌리면 바람따라 훨훨 자유인이 될 것이라고 믿어서 그런 것이다. 육체를 가루로 만들었으니, 그 육체는 사라졌다. 사라진 육체로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육체만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에 한계를 맞이한다. 유물론은 그래서 진리가 아니다. 물질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맞지만, 물질세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남자가 있고, 여자도 있다. 그와 같이 물질세계와 무형의 세계가 함께 존재하며, 창조세계는 무형에서 유형으로 진행되었다.
내가 교회에 가는 이유는 무형의 세계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중학교때부터 나는 신앙을 시작했다. 순복음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의 존재를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신앙의 길을 걸어오면서 삶속에 폭풍이 몰아칠 때마다 마음의 파도를 다스리기위해서 하나님을 붙잡고, 나의 주님을 붙잡고, 성경을 상고하면서 묵묵히 고독의 기도를 사랑하였다.
몹시 인생이 힘들던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고등학교 2학년때 맞이했다. 시골 출신으로서 별을 보며 자랐던 내가 순천이라는 도시에서 홀로 겪었던 쓸쓸함은 나를 깊은 철학의 세계에 빠지게 했고, 인생의 벽에 갇힌 나는 열쇠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였다. 그 시절, 나는 친구를 통해 시대 진리를 만났다. 기독교복음선교회를 통해서 성경의 깊은 비밀을 알게 되었고, 성경공부를 통해 나는 나를 발견하였다. 나는 당시 영혼이 갇혔으므로, 해방되길 원하였다. 말씀을 통해 나는 영혼의 자유를 얻었으므로, 구원주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쉽지 않았다. 국민대에 입학해서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나는 부적응 대학생으로 방황하였다. 지금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너무 잘못 살았다. 많이 회한(悔恨)이 남는다. 누군가 나의 수형(樹形)을 붙잡아줬어야 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나는 현실도피의 출구를 찾아서 해병대에 입대했고, 그때 신앙을 잃었다.
1994년 전역하고, 5년의 긴 방황을 통해서 1999년 진정 새로운 사람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나의 본격적인 신앙생활은 1999년부터 시작됐다. 나는 그때 그사건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만약 1999년 신앙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 않았다면, 지금의 장창훈은 존재할 수가 없다. 세상의 문화에 너무 빠져있었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형식적으로’만 인정하였다. 나는 말씀을 다시 배웠고, 실천신앙을 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 성경말씀도 실천의 감동이 오면, 그것을 반드시 실천하였다. 그렇게 내 삶을 고치고, 내 자신의 변화를 목표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점점점 변화의 봄이 내게 찾아왔고, 부활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나는 보험(保險)을 들지 않는다. 위험을 보장하는 것이 보험(保險)이다. 어떤 보험을 들지 않았지만, 나는 영혼의 생명보험은 가지고 있다. 내 육신에 사망이 덮치면, 나는 이 세상을 떠나야한다. 그 때 내 영혼을 위해 ‘의로운 행실’을 꾸준히 저축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행실을 행함으로 신앙생활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나는 죽음 이후에도 인생의 영혼이 존재함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