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영적 치료’는 영적으로 육신을 치료하는 것과 말씀으로 인식관을 치료하는 것으로 2가지 종류가 있다. 내가 거론하는 영적 치료는 ‘말씀으로 인식관을 치료하는 것’을 뜻한다. 잘못된 인식관은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지고, 잘못된 판단은 결국 영혼의 문제까지 결정하므로, 고정관념의 고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육신의 병만큼 절실하고, 중요하다. 영혼은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오냐 오냐”와 “안돼 안돼”는 교육에 있어서 필수품이다. “오냐 오냐”는 칭찬이며, “안돼 안돼”는 훈육과 질책이다. 당근과 채찍은 교육의 필수품이듯 그러하다. 하나님의 진리도 2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진리는 당근일 때와 채찍일 때를 명확히 구분하면서 교육생의 잘못된 인식관을 고친다. 실제로 효력을 발휘한다.
어제, 지인(知人)과 함께 성경을 배우면서, 말씀의 위대함을 진실로 체휼하고, 인정했다. 어거스틴이 만든 삼위일체설(三位一體說)이 천주교와 기독교의 근간(根幹)이 되었으나, 도대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안다고 믿어야하는 모호함에 종교인은 갇혔다. 무덤속에는 각종 뼈들이 들어있듯이 잘못된 이론속에는 의심의 냄새가 진동할 뿐이다. 무덤은 봉분이요, 곧 인봉(印封)이다. 인봉이 풀리는 것은 의심과 불신의 감옥을 벗어나는 것이다. 어제 삼위일체설을 상세히 배우면서, 성자(聖子)와 청년 예수의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두 존재의 분명한 차이가 드러날 때, 지인(知人)은 “아!!! 하늘의 사명자는 사람위에 하나님이 임한 사람이군요!!!”라고 분명히 깨달았다. 절벽을 오르듯, 날카로운 칼날위를 걷듯 매우 민감한 사건을 다루는 과목이었는데, 성경 강사님은 수술용 칼을 든 의사처럼 정교하고, 세밀하게, 교육생의 눈을 쳐다보면서 ‘이해의 치료과정’을 진행했다. 인식관이 변화하자, 얼굴에 빛이 들어오듯 화색이 돌았다.
두루뭉술은 모르는 것이다. 정확하게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삼위일체(三位一體)는 기독교의 핵심이론인데,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두루뭉술하게 설명한다. 예수님이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 존재했는가? 본래 존재했는가? 태초에 예수님은 존재했는가? 존재했다면 그 형상은 어떠했는가? 이러한 질문은 중세사회의 종교전쟁으로 이어졌고 수많은 신앙인들이 죽음을 맞아야했다. “예수님은 사람이며, 하나님이다”는 그 말을 ‘의심없이’ 믿기 위해서는 ‘의미없이 믿는 방법’외에는 답이 없었다. 맹목적 믿음만이 하나님이면서, 사람이신 예수님을 이해하는 길이었다. 그 무서운 삼위일체설(三位一體說)은 성부 하나님, 천모 성령님, 성자 주님으로 3분의 하나님이 각각 존재하면서 같은 뜻으로 역사하신다는 진리로서 의심의 먹장구름은 걷히고, 불신의 창살은 제거된다. 더불어, 예수님은 성자가 임한 신약의 사명자였고, 예수님과 성자는 전혀 다른 존재이지만, 신약시대에 성자가 예수님께 임해서 초림의 역사를 이뤘다는 것. 그래서 ‘강림’은 일체로서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 이 시대도 그러하다는 것!!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누가복음 9:60)
성경 강사님이 해당 구절을 읽었다. 부활론과 휴거론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인데, 이 구절에서 성경 강사님은 멈춰서 깊게 설명했다. 해당 문장에는 3종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1)죽은 자들 2) 죽은 자들 3)너
이 중에서 살아있는 자는 오직 ‘너’이다. 앞의 죽은 자들은 신앙이 죽은 자들이고, 뒤의 죽은 자들은 육신이 죽은 자들이며, ‘너’는 신앙과 육신이 모두 살아있는 자에 해당된다. 몸도 살고 영도 살아있는 자가 된다는 것은 ‘죽은 자들’과 구분된다. 죽으면 관(棺)에 들어가듯, 잘못된 인신관에 갇히면 죽은 것이다.
성경 강사님이 해당 구절을 놓고, ‘지인’(知人)에게 해당되는 성경구절이라고 정확히 표현했다. 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 아픈 부위를 그대로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순간이다. 보약은 몹시 쓰다. 반면, 먹으면 병이 치료된다. 지인(知人)은 그 말을 듣고 인식관속에서 연결된 ‘죽은 자들’의 의미를 진실로 깨닫고,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세상지식과 영적지식이 극명하게 차별되는 순간을 나는 보았다. 세상지식은 ‘죽은 자들의 종류’를 설명하고, 영적 지식은 ‘죽은 자들의 정의’를 내리면서 교육생과 연결해서 성령은 깊은 묵시로 치료를 한다. 진리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인간적으로 불편함을 피하려다가 영적인 고질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근본치료가 안되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했을 때 온 몸을 다해서 땅을 차지했듯이 고정관념을 치료하는 것도 근본문제와 충돌하면서 해결을 해야한다.
치료는 아픈 것이다. 통증이 반드시 발생한다. 통증없이 치료한다면서, 통증을 느끼는 신경을 차단하는 신경치료법이 요즘 유행하는데, 그것은 근본 치료가 아니다. 통증을 제거하는 것과 병을 치료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정말로 치료하면, 통증이 따라도 완전히 고쳐져서 정상이 된다.
어제 성경공부를 들으면서, 나는 1999년 내가 신앙의 길을 다시 회복하게 된 결정된 계기가 된 그 사건이 떠올랐다. 교회 전도사님이 내게 진심을 담은 충고를 했는데, 그 말이 정말로 아팠다. 뜨끔했고, 무서웠다. 많은 성직자가 있었으나, 오직 그 전도사님이 하나님의 심정으로 내게 훈육을 했다. 담배를 피웠던 나는 금연을 하지 못한 괴로움을 호소했었다.
“담배를 끊었다가 다시 피웠다가 계속 그렇게 하는 근본이유, 담배를 피우게 하는 근본 뿌리가 무엇인지 창훈씨가 진실로 깊게 하나님께 기도해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세요. 죄문제를 청산하지 않고서 담배를 끊으면 언젠가 다시 담배를 피울거예요. 죄문제를 뿌리뽑지 않으면, 영적 감옥에 갇힌 것이고, 결국 그 영혼이 어디에 갈까요?”
그때 나는 정말로 충격을 받았고, ‘지옥에 갈 내 영혼의 운명’을 놓고서 죽음에 직면한 사람으로서 처절히 낮아졌고, 하나님께 내 영혼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메달렸다. 내 인생가운데 ‘사랑의 심정으로’ ‘영적 죽음의 상태’를 알려줬던 그 교육이 결국 ‘생명의 길’이 되어서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생명을 살리는 길은 이처럼 진실한 약침(藥針)으로 기적이 일어남을 오늘도 믿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