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예배의 끝자락은 권면의 말씀이다. 금일 “하나님의 사랑 역사”의 주제로 사랑의 근본, 기도와 대화의 차이점, 생활속 사랑의 실천 등등 깊은 말씀이 흘러 넘쳤다. 모든 말씀이 끝나고, 제법 진지한 상황에서 정명석 목사님께서 권면의 말씀을 하게 됐다. 사회자가 “권면의 말씀을 해주시겠습니다”라고 해서, 정명석 목사님은 준엄하게 단상에 서서, 성도들을 지긋하게 내려다보시며, 사회자를 다시 보면서,
“권면하라고 하면, 냉면이 생각납니다. 밥때가 됐잖아요”
성도들은 잔뜩 긴장했다가 웃음으로 확 터졌다. 언어의 마술사, 언어의 달인, 역시 말씀이 육신화된 시대의 사명자답게, 길어진 예배시간의 끝에 ‘권면과 냉면’으로서 성도들의 배고픔도 이해하시면서 언어로서 그 마음을 새롭게 자극하신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언어는 모든 마음의 얼굴이요, 생각의 표정과 같다. 정명석 목사님의 언어는 살아있어 운동력이 있고, 틀을 벗어난 자유의 날개가 파도친다. 그러니, 성도들은 금방 반응한다. 권면에서 냉면을 연출하시면서 성도들과 하나로 어울어지는 그 화법은 역시 신부시대의 사명자로서 ‘생활속 사랑의 실천’이 얼마나 부드럽고, 경직되지 않으면서도, 더불어 진실해야하는지, 넌지시 알려주신다.
왕(王)은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다. 주인이라서 그렇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벼이삭을 따서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의 법도를 범했다고 추궁했다. 그때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명언을 남기면서 제자들을 변호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시간이니,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몸은 자기 것이니 자기가 맘껏 만지고 움직이고, 이리저리 행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주인은 언어가 다르다. 주인의 존칭어는 ‘주님’이고, 줄임말은 ‘주’(主)이고, 극존칭은 주인공(主人公)이며, 주인장(主人丈)도 존칭어다. 주어(主語)는 문장의 주인이며, 주부(主部)는 전체 문장의 주어역할을 하는 작은 문장이다. 문장에 목적어가 있듯이, 시대의 섭리는 곧 주부(主部)이며, 목적어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며, 서술어는 항상 역사의 펼쳐짐이다.
국문법에서는 ‘은는이가’ 조사가 붙어야 주어다. 붙지 않아도 주어가 되는 경우는 생략되어서 그렇다. 국문법에서는 반드시 주어에 ‘은는이가’가 붙는다. 시대의 주어는 곧 시대 사명자이며, 시대 사명자는 말씀을 선포하고, 시대 사명자는 항상 성삼위가 함께 한다. 그것을 통해 시대 사명자의 말씀을 믿고, 알고, 깨닫는 것이다. ‘은는이가’가 있는 단어가 주어이듯이, 시대 사명자는 그 증표가 많다. 전쟁에서 평화로 바뀌는 ‘때의 증표’, 3.16의 증표, 성경인봉 해석의 증표, 1999년과 인터넷의 증표, 2018 남북평화회담의 증표, 1978과 다니엘의 증표 등등이다. 오늘은 ‘권면과 냉면’의 증표로서, 정명석 목사님이 얼마나 자애롭고, 성도들의 배고픔을 이해하면서, 언어로서 함께 화동하고 대화를 나누시는지, 내가 믿고 따르는 시대 사명자, 시대의 주인공이 언어의 말씀으로서 최고의 표현력을 발휘하시니, 자긍심이 샘솟는다.
누군가 내 등을 두드렸다. 예배가 끝나기 전인데, 어떤 집사님이 허리가 나갔다면서 내게 데려왔다. “왜 나에게?”라고 나는 스스로 반문하면서, 어떻게 탈출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부담의 어깨가 주눅들었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었다. 내가 배운 것이 있으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해야한다. 그래서, “밥 먹고 봐요. 엉덩이는 뒤로 바짝, 허리는 등받이에 기대고, 발은 바닥에 반드시 닿아야, 몸무게가 등과 다리로 분산되면서 요추에 힘이 덜 가게 돼요. 밥 먹고 차근차근 이야기해요”
그렇게 잠시 그곳을 빠져나갔다. 내가 고쳐야한다면, 그것은 낭패다. 고쳐도 낭패고, 못 고쳐도 낭패다. 왜 내가 고쳐야하는 책무가 있는가? 의료인이 아니므로, 나는 고쳐서는 안된다. 환자의 고통을 호소해도, 나는 고칠 수 없는 위치다. 단지, 체형을 분석해서, 왜 아픔이 생겼는지, 그 고통의 근본 뿌리가 무엇인지, 상대를 이해시키고, 설득해서, 생활의 패턴을 변경할 수 있도록 운동방법을 지도해주는 것이 나의 역할인데, 현재 공부중이다. 그런데, 실습과정이 상당히 빠르다. 협회에서도 날마다 실습이고, 취재를 나가서도 실습이고, 교회에서도 실습이다. 식사후, 그 성도가 내게 왔다. 허리와 얼굴에 긴장감이 잔뜩 들어가서 내게 왔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는 못 고쳐요.”
내가 못 고친다고 하니, 그 집사는 나를 어이없게 쳐다봤다. 다시 내가 말했다.
“단지, 허리가 아픈 배경을 알려줄 수 있어요. 아픈 것은 한의사 있죠? 거기 전화해봐요. 병원에 가는 것도 좋구요. 자!! 그럼 시작해볼까요?”
못 고친다고 내가 먼저 선언하니, 얼마나 부담이 덜어지는지…. 허리가 아픈 사람은 그 이유가 단순하다. 내가 거기에 해당된 적이 있어서 답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뱃살 때문이다. 뱃살이 많은 사람은 비만증이고, 신경이 굳어서 만지면 엄청나게 아프다. 가끔 배변을 볼 때, 통증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 배근육의 통증이다. 배변이 나오면서 경직된 배근육을 안에서 밖으로 누르니까 배근육이 아픈 것이다. 배근육은 꼬집는 방법으로 풀어주면 살아나고, 살아난 후에는 반드시 심호흡 근육강화훈련을 해야한다. 혹은 다른 방법으로 배근육 강화운동을 해야한다. 그리고 등근육과 옆구리 근육도 만져주면서 강화하면 된다. 그러면 허리통증은 근방 없어지고, 만성 고질병도 고쳐진다.
내가 못 고친다고 말한 것은 고칠 수 없는 위치이며, 고쳐서도 안되는 위치라서 그렇다. 더불어 고쳐야하는 책무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요추의 통증은 결국 당사자가 운동법을 하느냐, 안하느냐로 달라진다. 내가 아무리 운동방법을 알려줘도 그 당사자가 나를 신뢰하지 않고 행하지 않으면 배근육은 강화되지 않는다. 배근육이 탄탄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없다. 배근육이 탄탄하면 그 다음은 발근육 강화훈련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