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극심한 차별에서 기독교는 태어났다. 2번의 엄청난 핍박, 예수님이 생존했을 당시 유대교로부터 핍박, 십자가 사건, 그때가 정점을 이뤘다. 이후 1600년 동안 중세의 절대권력으로 성장한 천주교는 유대교의 전철을 밟았다. 예수님의 심정으로 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던 선지자 루터를 박해한 로마 교황청,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의 사역을 하는 자들을 억압하는 ‘골육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모르면 그렇다. 모르면 복도 발로 차고, 보물도 돌처럼 다룬다. 그렇게 기독교는 핍박을 통해 새로움으로 변혁되었다.
나는 니골라당과 같은 특권층의 권위의식을 경멸한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고, 루터를 마귀로 규정했던 본질이 그러하므로…. 오직 했으면 캘빈이 절대예정론으로 교황에게 있던 ‘신의 대리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귀시켰을까. 모든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 온다는 절대적 교리는 루터와 캘빈을 통해서 완성되었다.
기독교가 잘되는 것은 종족주의를 벗어나서 그렇다. 종족주의는 민족이며, 국가다. 모든 민족종교를 조사하면, 민족의 틀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유대교가 정치와 권력과 경제와 법률을 장악하였다고 해도, 유대교는 유대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방카가 유대교로 교적(敎籍)을 바꿨다고 해도, 그것은 그 1명에 해당되는 특별한 경우이지, 유대교로 종교를 바꾸려는 여론은 거의 없다. 그들은 결혼을 통해서 자녀를 낳으면 교세가 확장하는 시스템이다. 결혼을 통한 교세 확장은 구약시대의 선교방법으로, 결국 한계를 맞이한다. 유대교와 이슬람이 결혼제도가 매우 강하고, 자녀를 통해서 교세를 증가하는 것을 교리로 삼고 있다. 유대교는 철저한 민족주의로서 유대인은 유대인과 결혼한다. 반면, 이슬람은 결혼제도가 느슨하면서 일부다처제를 통해서 기하급수적 교세확장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기독교는 구약의 방식을 벗어났다.
금수저가 바로 종족주의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세습이 없다. 반면, 자본주의는 경제의 세습이 있다. 상속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땅을 가져갈 수 없으나, 남은 가족이 혈연을 통해서 재산을 분배한다. 자본의 상속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런데, 영적인 신앙에서 ‘금수저’와 같은 특권층이 있게 되면 극심한 분열을 조장한다. 특권층이 발생하는 교리를 채택하는 종교는 기하급수적으로 교세가 확장될 것 같아도 금방 한계를 맞는다. 피라미드 방식이라서 그렇다. 기독교가 유대교와 차별화를 이룬 것은 선교방식에 있어서 특권층을 배제한 것이다.
성골과 진골이 바로 ‘종족주의’다. 누구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골과 진골에 따라서 왕이 될 수 있고, 6두품으로 계급을 특정하므로 사회는 점점점 퇴보하게 된다. 조직이 이렇게 중요하다. 조직 자체가 확장성이 없고 폐쇄적이면 아무리 조직을 정비해도 새롭게 되지 못한다. 지금 시대에 그 누가 신라의 골품제를 옹호하겠는가. 예수님은 종족주의를 일찌감치 벗어났다. 예수님의 형제로서 특권층이 어디에 있는가. (천주교에서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경배가 있으나, 마리아의 자녀들, 예수의 형제들을 통한 혈연주의는 없다)
특권층이 설정된 종교는 결국 한계를 맞이하고 교세확장이 어렵다. 세상은 특권층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어서다. 특권층이 없어야만 보편성으로 모두가 좋아하는 이상세계를 이룰 수 있다. 민주주의 제도를 전세계가 표방하는 이유는 ‘모두가 행복한’ 제도일 수 있어서다. 모두 만족하는 제도는 불가능하지만, 모두가 차별당하지 않는 제도는 가능하다. 그것은 특권층을 없애는 것이다. 특권층이 존재하는 그 순간 차별이 일어나면서 공산주의 시스템이 가동된다. 독일의 나찌즘, 중국의 공산당, 이스라엘의 종족주의, 이슬람의 IS사상 등이 그렇다.
나는 차별없는 평등을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