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성령의 독과점 사상’은 유대인의 선민사상과 직결되며, 의료법과 변호사법과 흡사하다. 의료법에서는 의사만 치료할 수 있고, 변호사법에서는 변호사만 소송을 할 수 있고, 형사소송법에서는 검사만 기소할 수 있다. 어떤 권리를 특정 계층이 독점하는 것, 그것이 독과점이며, 특허의 권리이며, 공정거래법으로 보면 독점은 허용되지 않는다. 유대교와 예수교의 싸움은 특허소송과 매우 흡사하다.
예수님은 복음서를 통해 볼 때. 세례요한의 교단에 속해서, 세례요한의 안수를 받고서 목사가 되었다. 지금의 신학용어로 재해석하면 그렇다. 문제는 환자를 고친 것이다. 병든 자, 죄인들에게 용서의 법을 선포하면서 신유의 능력이 곳곳에서 일어나므로, 문제가 발생했다. 의사 자격증이 없으면서 병자를 고치면, 의료법 위반이다. 변호사가 아니면서 법률대리를 하면 변호사법 위반이다.
죄사함의 권리는 제사장에게 맡겨진 것이며, 모세가 레위지파에 특별히 허락한 권리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레위지파가 아니었으니, 제사장의 권한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제기된 것이다. 율법의 장막을 폐한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서, 십자가 위에서 용서의 법을 선포하면서 스스로 번제물이 되어서 희생의 제사를 드린 것이다. 이러한 신앙적 논증이 히브리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고 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깨달았을 때도 하나님께서 알게 하셔서 알았다고 했다. 성령이 임했을 때, 믿는 자들 모두에게 각각 임해서 성령의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다. 마치 창세기에 하늘과 땅, 만물, 생물이 창조되듯이 각 사람의 개성이 표출되는 대역사가 일어났다. 성령의 독과점 사상이 이때 발생했다.
베드로가 어느날 옥상에서 기도하는데, “먹으라”는 환상을 본다. 율법에서 금지한 것들이 보따리에 있는데, 그것을 먹으라고 하니, 베드로는 거부했다. 베드로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극명히 대립된 사건이다. 사도행전 10장 고넬료를 전도한 간증 내용이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율법’으로 못을 박았음에도, 초기 기독교인은 여전히 율법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했다. 성령은 율법의 인본을 폐했으나, 율법의 인식관에 세뇌당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율법에 속해야 성령을 받는다는 사상이 매우 강했다. 베드로는 옥상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면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서서히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고넬료를 방문해서 엄청난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다. 성령이 유대인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원하는 각 사람에게 은혜를 부어주심을 본 것이다. 그 작은 사건이 지금의 기독교가 되었다. 성령의 속성은 이처럼 독점이 아니다.
‘나만 옳다’는 사상이 바로 독선(獨善)이다. 나찌즘의 근본이 이것이다. 선민사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스스로의 얼굴’을 못보는 사상이 바로 선민사상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혹시 하나님이 보실 때 허락하신 것이면, 내가 바뀌어야한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시는데 내가 여전히 싫어한다면 그것이 ‘율법의 인본’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가,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창세기 1장에 가장 많이 사용된 문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바로 ‘하나님의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고넬료의 전도 간증은 하나님의 관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한국인텨넷기자협회 회장이 어느날 내게 “창훈아!! 너는 참으로 마음이 착하고, 행실이 올바르다. 그런데, 배타적 사상이 너무 강하다. 남을 인정해야 너의 가치도 존중받는 것이 상식이란다”라고 조언했다. 그때 나는 그 깊이를 잘 알지 못하였으나, 오랫동안 그 말을 숙성하면서 ‘배타적 사고관’이 얼마나 틀렸는지, 무서운지,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배타적 사상을 배제하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몸부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