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율법이 금지한 족발환상을 보고 기겁을 한 것은 당연하다.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갈만 얹으면 되는 ‘족발 밥상’에 베드로가 겁부터 먹은 것은 당연하다. 철저한 예수님의 교육덕분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유대교를 분리해서 생각하지만, 그 당시는 전혀 아니다. 둘은 하나였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율법주의자인지 알 수 있다. 십자가 사건도 모세의 유월절을 지키려다 그렇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다간 사도 바울조차 율법을 고수했다. 율법을 지키면서 제도를 완화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이 수도생활을 할 때 얼마나 엄격하고, 철저하면서, 탐욕과 색욕과 권력에 대해 금기했는지 알 수 있다. 오직 하나님 사상으로 중무장하고, 모세보다 더 철저하게 신앙관을 확립하고 목회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안식일에 병고친 사건 ▲밀알을 비벼먹은 사건 ▲병자의 죄를 용서한 사건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 등등 율법에서 허용되지 않는 수많은 모순이 있었다. 율법을 기준하면 모순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그 무엇의 흠집을 잡는 자라면 율법주의자이며, 흠집을 보고 덮어주는 자라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은 자이다. 내 삶의 향기를 스스로 관찰함으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내면에 머물게 해야한다. 그것이 율법의 엄격함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는 신앙훈련이다. 가인에게 하나님은 “죄를 다스리라”고 했다. 율법의 뒷면은 정의다. 정의의 총칼로 비난의 총알을 발사하기는 쉬워도, 총구를 내리고 용서의 포옹을 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 누가 행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