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선지자와 설교가는 다르다. 목회자는 선지자의 소명을 가져야한다. 언젠가 어떤 교회에서 “인생의 정체성은 예수님께 받은 사명으로 정의해야한다. 소명은 곧 부르심이고, 예수님께 받은 사명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다”라고 설교했다. 인생길, 참 힘들고 어렵다.
성경을 압축하면, ‘소멸과 창조’다. 아멘!! 나는 새롭게 바뀌길 간절히 염원한다. 나는 재건축되고싶다. 선지자의 사명은 무엇인가? 혹자는 “먼저 아는 것”으로 정의하겠으나, 전혀 다르다. 그 무엇을 먼저 아는 것은 선지자가 아니다. 한자로는 ‘선지자’(先知者)이지만, 선지자의 소명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하나님이 외치라는 말씀을 외치는 것이다. 그것이 선지자의 소명이다.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알았으므로, 그것을 외치는 선지자의 소명은 격돌과 불편이다.
“멸망당하리라”고 예레미아가 예언했다. 결혼을 꿈꿨던 예레미아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내다봤다. 아, 서글픔이여. 다니엘은 예례미아의 그 예언이 언제인지 깨달음으로 해석해서 기록하기도 했다. 루터는 성경에 근거해 교황의 틀렸음을 알았으므로 95개조 반박문을 공표했다. 아, 두려움이여. 선지자의 소명은 조선시대 ‘충신의 사명’과도 같다. 대중이 듣기좋은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다. 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처럼 채찍을 들고 휘둘르듯 말하는 것이다. 에스겔, 예레미아, 다니엘, 엘리야, 호세아 등등 모든 선지자들은 그렇게 인생을 살아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원주’로 인식하는데, 예수님은 모든 사역을 감당하심으로 새롭게 하셨다. 즉, 선지자로서 소명도 살아내셨다. 제사장의 사명도 감당하셨고, 신약의 시작점으로 후아담의 사명도 감당하셨다. 제사장으로서 직분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통해서 하늘의 중보자로서 대제사장이 되셨다. 히브리서를 통해 자세히 증언된다. 선지자의 소명은 마태복음에 말세예언을 통해서 자세히 나온다. 선지자의 소명은 어떤 예언사상과 많이 다르다. 죽음을 내걸고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해야할 말은 반드시 하는 것, 목회자에게는 단상이 곧 선지자의 소명이 부여된 곳이다. 무엇을 설교할까? 무엇을 외칠까? 많은 주제가 있겠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함으로 말씀이 현실을 끌고가게 하는 것, 하나님을 향하도록 회개를 촉구하는 것, 환란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말씀을 외치는 것, 선지자의 소명이다.
이스라엘 백성인 예레미아는 제사장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외쳤다. 보았으므로, 외친 것이다. 영화 ‘예레미아’를 보면, 그 처절한 심경을 알 수 있다. 호세아 선지자는 바람치는 아내와 결혼하면서 하나님의 비통한 심경을 깨달았다. 노아는 홍수의 범람으로 죄악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관점은 무엇인가?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영성으로 돌이켜야한다. 겸허함의 고막을 열어야한다. 들을 귀가 없으면 듣지 못한다. 경청의 자세는 하나님의 깊은 묵시를 듣는 것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보는 편견이 있다. 하나님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는 것, 하나님이 들려주고 싶은 것을 듣는 것, 그것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마음의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져야한다.
내가 전도한 중학교 동창이 내게 말하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놓고 보낸 편지 있지? 수십장의 편지를 내가 읽고서, 말씀을 듣기로 결심했어”라고 했다. 나는 그때 사건을 분명히 기억한다. 깊은 고뇌속에 하나님께 기도하고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경으로 그 편지를 썼던 것이다. 어찌보면, 하나님의 심경을 대변하듯 썼었다. 나의 진심에 성령이 함께 하셨으리라. 그 편지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선지자의 소명은 그러한 열정이요, 간절함이요,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야할 말을 하는 것이다. 앵무새처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선지자의 다른 이름은 ‘하나님께 쓰이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입술이다. 그래서, 선지자의 소명으로 목회단상에 서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진실함이 목회자의 마음에 임해야만, 그 불이 성도에게 전달됨으로 온화함이 교회에 머물게 된다. 스스로 불타지 않으면서 상대를 불태울 수는 없다. 불은 논리를 초월해서, 하나님을 루터처럼 체휼함으로 전파하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성경의 지식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하나님을 배워간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다.
** 신학을 권유받았다. 기도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