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사도행전 3장부터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병자를 일으키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던 치유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부활의 주님이 살아나심으로 죽었던 심령의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 본격화된다. 여기서 죽은 자는 심령이 죽은 자들이요, 관계가 단절된 자들이요, 재능이 묵혀서 죽었던 자들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면, 조직이 정비되면서 인사정책이 새롭게 된다. 베드로가 제일 먼저 했던 것은 기도에 힘쓴 것,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며, 결과로서 인사정책이 새롭게 개편되었다. ‘맛디아’가 선출된 것이 대표적인 표징이다.
사도행전 1장과 2장과 3장을 깊게 탐독하면, 1가지 결론에 이른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다.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의뢰와 신뢰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라고 조롱하였던 자들앞에서 예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다. 십자가위에서 죽음을 맞고 운명하셨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고난의 주가 되셨으나, 하나님은 쓸쓸한 죽음 끝에 영광의 주로 부활하셨다. 그처럼 제자들은 뿔뿔히 흩어졌으나 부활의 주님을 통해서 새로운 부활이 선포되면서 ‘신본주의’로 바뀐 것이다.
베드로가 병자들을 고치고, 제도를 정비하는 모든 근본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가능함을 알 수 있다. 베드로의 모든 인식관이 바뀐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때 비로소 가능하다. 왜 하나님은 행하지 않으실까? 하나님을 100% 의지하지 않아서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의 손을 잡고서 그냥 일으켰다.
뭔가를 달라는 그 손길에 ‘구제의 물건’을 주지 않고, 구세주의 이름을 준 것이다.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믿음의 신앙심’을 주는 것, 그것이 가장 고귀한 일이다. 베드로, 요한 등등 11사도와 70문도는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부활하는 신앙관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순교자들의 신앙관이다.
구걸(求乞)과 구원(救援)은 하늘과 땅 차이다. 구걸은 거지처럼 구하는 것이다. 기도와 제사가 복을 받으려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이 들어가면, 그것은 구걸신앙이다. 구원의 신앙이 들어가야한다. 자신의 정신이 구원주를 명확히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본주의자가 되는 것, 그것이 구원의 핵심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구걸하는 신앙이 될 수 밖에 없다. 베드로와 요한 등등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후, 더 이상 빌어먹는 신앙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서 자신의 생활부터 총점검하면서, 자신의 죄문제는 항상 청결하게 하고, 회개함으로 스스로 구원의 생활을 해나간 것이다. 구원을 받고서 범죄를 생활화했던 과거의 삶을 완전히 차단한 것이다. 신본주의가 된다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가룟유다가 은 30냥(30세겔=1천만원)에 예수님을 팔았다고 그를 심판하는데, 그래서 자살해서 죽은 유다를 비난함으로 스스로 자족하는데, 우리가운데 과연 하나님과 세상을 뒤바꾸면서 살았던 적이 없는가. 누구를 의지함으로 우리는 살고 있는가. 진지하게 물어야한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함께 비교해서 검토하면 가룟유다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으나, 심령을 회개하지 못함으로 자살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돌이키지 못한 것이다. 가룟유다는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그 때 자살한 것이 아니고, 40일 부활주간동안에 자살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마태복음 27장]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사도행전 1장]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마태복음 26장]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중략)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가룟유다는 은 30냥(30세겔=1천만원)을 돌려줬고, 또한 은 30냥(30세겔=1천만원)으로 밭을 구입했다. 2가지 사건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면, 가룟유다는 은 30냥을 받고서 어떤 밭을 구입했는데, 나중에 은 30냥을 돌려준 것이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밭을 산 후에 은 30냥을 다시 돌려주기까지 기간, 그것이 십자가 사건 이후 40일 정도이며,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에 해당된다. 그러나, 유대는 자살을 택했고, 베드로는 순교를 택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는 여기서 달라진다. 사람을 의지하면 그것은 인본주의요, 하나님을 근본으로 의지하면 그것이 신본주의다.
구걸하는 신앙, 거래하는 신앙, 이런 삶은 구원의 신앙이 아니다. 구원(救援)은 구원주를 믿고 의지함으로 자신의 인생관을 스스로 구원해서 살아가는 신앙이다.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복음서를 통해 깊게 묵상하면, 십자가의 부활이 자신에게도 일어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거지같은 구걸의 신앙인지, 가룟유다같은 거래의 신앙인지, 베드로와 같은 구원의 신앙인지, 자신을 점검하면서 하루를 살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