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말씀과 말씀의 언어는 다르다. 태초에 존재하는 그 말씀을 ‘말씀’이라고 하고, 말씀의 언어는 인간의 단어로 표현된 것이다. 근본이 있고, 근본의 표현이 있다. 둘은 다르다. 다양한 교단에서 성경해석을 하면서, 말씀의 본질을 왜곡할 때가 많다. 성경해석은 말씀을 보게 하는 길라잡이 역할일 뿐, 성경해석 자체가 진리가 될 수 없다. 성경해석을 통해서 ‘태초의 말씀’을 향하게 하는 것, 교회 교육의 핵심이 되어야한다. 그 외에 신앙인에게 무엇이 필요하랴.
열왕기상 17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근본 핵심은 까마귀밥을 먹는 엘리야이며, 3년후 갈멜산에서 선과 악의 영적 전쟁을 한 것이다. 여러 교단에서 까마귀밥을 놓고 다양한 해석을 한다. ①우상숭배자 ②영적 귀신 ③생물 까마귀 ④아랍인 등등 까마귀의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한다. 모두 오묘하고, 신비롭다. 그때 그사건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으니, 엘리야만이 열왕기상 17장 사건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는 해석일 뿐이다.
지금 나에게,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있는가? 흉조가 먹을 것을 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과연 그것을 약속으로 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라고 기도했다. 제발 죽음이 피해가길 간구했다. 그런데, 십자가는 예수님을 까마귀처럼 메달았다. 죽음의 십자가!!!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구원의 표징으로 삼았다. 아!! 얼마나 오묘한 신의 섭리인가!! 엘리야에게 일어난 그 까마귀의 정체성을 지식으로 풀어서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중요한 것은 내게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냐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까마귀밥을 먹어도 행복하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가뭄이 들어도 풍요롭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숨어 살아도 자유롭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어느날 사르밧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사르밧은 이세벨의 고향땅이다. 엘리야가 과연 가고싶었을까? 인간적으로도 적국에 가는 것인데, 가고싶었을까? 우상숭배를 거부한 엘리야가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이방의 우상국가로 가서, 사르밧 과부의 마지막 만찬을 달라고 요청했으니, 과연 하나님의 자존심은 무엇인가!! 신앙은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복함으로 행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처참한 인생, 노숙자처럼 비굴한 인생을 살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인격을 유지했고, 말씀의 거룩함을 지켜냈다. 엘리야에게 까마귀밥은 어떤 의미였을까? 까마귀는 곧 우상숭배자라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지식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한 성경해석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깊어져야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의 깊이가 더해질 때, 인생은 성경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 외에 무엇이 중요하랴!!
드라마 ‘남자친구’에서 송혜교가 지갑을 잃고서, 처음 만난 박보검에게 “돈 좀 있어요?”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돈이 정말로 없었고, 그 남자가 편해서 부탁한 것이다. 마음이 통한 것이다. 박보검은 송혜교가 너무 좋으니까, 비자금으로 감춰놓은 모든 돈을 꺼내서 준다. 바로 사르밧 과부의 마음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까마귀밥의 속사정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잘 차려진 밥상이든, 허기를 겨우 채우는 밥상이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이면, 그것이 기쁨이다. 예수님은 40일 금식기도 끝에, 마귀가 ‘돌이 떡이 되게 해보라’고 제안할 때, “사람이 떡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선언했다.
말씀으로 산다는 그 명제는 신앙인이 반드시 명심해야할 절대진리다. 우리는 오늘,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엘리야는 까마귀밥이나 사르밧 과부의 식량으로 살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았더니, 먹고 사는 경제문제가 해결되었고, 갈멜산 사건을 통해서 국가의 종교정책까지 근본으로 바뀐 것이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선지자, 순교자가 말씀에 순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을 명심해야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하나님의 섭리가 이방으로 확장해서 흐르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모든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