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구원했으니, 너는 내게 절대 복종하라.”
과연, 이것이 진리인가? 아니다.
성경의 인봉을 모두 풀면, 구원주인가? 예수님이 구원주인 것을 지식으로 모두 알지만, 그 지식이 예수님의 나라에 가게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상식이다. 예수님은 성경의 인봉을 풀어서 구원주인가? 그래서 구원주면, 사도 바울도 구원주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사도바울이 구원주가 아니듯, 성경해석과 구원주는 별개의 문제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3대 시험이 나온다. 첫 번째는 경제시험, 두 번째는 성경해석 시험, 3번째는 권력시험이다. 2번째 시험을 보면 마귀가 성경을 해석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했다. 성경의 인봉을 풀었다고 해서 인생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적발된 여자가 예수님앞에 놓였다. 엉겹결에 예수님은 재판관이 됐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검찰이 됐고, 백성은 방청객이 됐다. 제사장들도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하실까? 율법은 곧 성경이다. 율법을 따라 예수님은 그 여인을 어떻게 하실까? 예수님은 땅에 뭔가를 썼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누가 알랴.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
예수님은 율법을 선포하되, 율법을 재해석하면서 현실에 새롭게 적용했다. 현장에 붙잡힌 간음한 여인을 살리기 위해서 살리는 법률을 적용한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죄인을 구속하는 율법을 적용했고, 예수님은 죄인을 살리는 율법을 적용했다. 예수님이 구원주인 것은 생명을 구원해서 그런 것이다. 살리시는 분이 곧 예수님이다. 구원은 성경 해석에 있지 않고, 성경을 통해 생명을 살림에 있다. 성경을 깊이 상고하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신앙의 상식이다.
마태복음 17장에 예수님과 베드로의 일기장이 나온다. 반세겔 동전과 물고기 이야기다. 예수님의 이야기지만, 마태를 통해 베드로가 쓴 것이다. 마태는 왜 그 이야기를 썼을까? 깊은 내막은 세금문제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국가에 세금을 내면 간단하다. 그런데, 일제치하에서 세금을 내는 것은 친일파가 된다. 예수님이 죽고, 로마와 유대교는 극심한 독립운동을 했다. 티토 장군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로마와 유대교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초기 기독교인은 유대교에 속했다. 그들은 갈등했다. 로마에 세금을 내야하나, 내지 말아야하나. 이것은 죄의식과 연결된다. 민족을 생각하면 세금내는 것이 민족의 반역죄이고, 로마를 생각하면 정치의 반역죄이다. 세금납부 자체가 양심의 범죄였다. 그들에게 답안지를 준 것이 마태복음 17장이다. 성경의 복음서는 이러한 구원의 길을 제시했다. 반세겔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성전세를 낸 것이 핵심이 아니다. 그러한 일화를 소개한 마태의 목적은 로마에 세금내는 것은 각자 알아서 판단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금 납부와 관련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답안지를 말씀했다. 그 또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세금납부와 관련된 죄의식에서 해방시키는 말씀이었다. 세금체납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권력은 곧 노예다. 예수님은 권력과 관련해서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섬기는 자가 주인이고, 다스리는 자가 종이라고 법률을 정했다. 마귀는 “절하라”고 했다. 섬김을 받는 권세자는 마귀다. 성경에 따라 보면 그렇다. 예수님은 섬김을 다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겼다. 그것이 그저 교육적 차원이었을까?
우리는 간혹 “예수의 종”이란 표현에서 ‘아직도 종이냐’라고 비판하는데, 문자적 맹점주의다. ‘예수의 종’이란 표현은 극적 사랑이다. 예수의 종은 ‘예수를 따르는 자’를 말한다. 얼마나 고귀한 표현인가. 모든 관계에서 근본 핵심은 ‘자유와 사랑’이다. 더불어 성경의 해석은 법률해석과 같아서, 각 사람의 영혼과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 핵심이지, 성경의 비밀을 지식으로 풀어내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어느 누가 성경을 지금 완벽하게 풀어도, 언젠가는 그 해석이 옛날 것으로 취급될 수 밖에 없다. 시대가 흘러서 그렇다. 성경은 영원하되, 성경해석은 영원하지 못하다.
성경은 헌법과 법률이요, 성경해석은 법률해석이다. 법률해석은 오로지 생명을 구원하는데 사용되어야한다. 생명을 정죄하는데 사용되는 성경해석은 검찰처럼 범죄자를 만드는 율법주의자이다. 종교 교리가 복음주의인지, 율법주의인지, 이것으로 구분한다. 자유를 주는 진리는 변호사와 같고, 범죄를 규정해서 가두는 진리는 검사와 같다. 진정한 진리는 자유를 주고, 진실한 사랑은 생명을 구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