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가끔 단순하다. 돈마귀, 명예마귀, 권력마귀를 조심하라고 마태복음은 말한다. 예수님의 3대 시험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에서 권력마귀가 정말로 무섭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은행대출을 받으면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구조는 보편적으로 돈의 흐름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먹고 사는 문제는 2천년전에 비해서 확실히 윤택해졌다. 명예적 측면도 언론과 각종 단체가 많아서 영예로운 상들도 많고, 해당 부분도 충분히 해소될 수 있다.
반면, 권력은 희소성이다. 권력은 모든 단체마다 반드시 극복해야하는데, 그 정답은 ‘섬김의 자세’로 극복할 수 있다. 권력을 넘지 못하면, 이슬람의 수니파와 시아파 사태가 발생한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칼리프를 놓고서 권력쟁탈전을 벌인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권력투쟁을 했었다.
생각해보라. 예수님이 세상만국의 통치구도가 보이지 않았을까? 백성의 여론을 활용해서 기득권을 무너뜨리고 정치권력을 잡을 묘책을 몰랐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셨다.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의 삶이 신앙인들이 따라야할 표본이다. 교과서이다. 여기서 벗어나면, 참된 신앙인이 아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사라지는 순간, 권력투쟁이 발생한다. 곧 전쟁이다. 십자가 정신은 순교의 자세이다. 십자가 정신이 있어야만 권력투쟁을 막을 수 있다.
예수님이 권력마귀에게 했던 단호한 어투가 자신의 이모에게 했던 어투와 비슷하다. 사도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이모인데, 예수님께 권력청탁을 하다가 매몰찬 소리를 들었다. 예수님은 ‘권력의 소유화와 세습화’를 극히 경계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4장]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0장]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권력의 지배’를 극히 경계했다. 섬김을 받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예수님도 부활의 주님이 되시고, 승천하신 후에야 신의 극존칭으로 섬김의 대상이 된 것이지, 살아있는 동안에는 섬김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섬김의 대상이 되면, 섬기는 자들은 땅을 쳐다보게 된다. 하늘을 쳐다봐야할 성도들이 땅을 쳐다보면, 그 성직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이 된다. 미운 물건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쳐다보지 않고, 땅을 쳐다보는 것이다. 우상은 곧 땅에 있는 형상이다. 땅의 것을 의지하는 것이 미운물건이고, 우상이다. 인생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해야한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신앙을 버리지 말아야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정신’을 물려주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정신’을 물려줬다. 예수님 자신을 따르라고 했으면 권력의 세속화가 이뤄졌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섬겼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렸다. 예수님이 마귀를 이긴 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관’으로 이긴 것이다. 이것은 절대불변의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