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이단의 덫에서 탈출하는 것은 북한을 벗어나는 것처럼 힘든 일이다. 북한의 탈출은 목숨을 담보로 탈출해야하고, ‘이단적 북한’은 구원을 담보로 탈출해야한다. 그래서 거의 불가능하다. 지옥에 갈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탈출이 불가능하다.
북한의 탈북자는 한국에 오면 자본주의 사회가 익숙하지 않다. 정착금은 낯선 돈이다. 위에서 주는 복지 정책에 익숙해서 그렇다. 소유해본 적이 없는 아이에게 1천만원을 주면 얼마나 당혹스럽겠는가? 그와 같다. 그래서 탈북자는 사기를 많이 당한다.
세뇌(洗腦)는 뇌를 씻는다는 의미로서, 프로그램을 뜻한다. 동서남북의 방향을 정해놓으면, 누구나 동서남북을 인지한다. ‘까마귀=흉조’의 상징이 한국에는 성립한다. 그래서 누구나 까마귀를 보면 기분이 나쁘다. 그런데 중국은 ‘까마귀=길조’라고 코딩이 되어 있으니, 까마귀떼가 울어도 좋아한다. 이렇게 다르다.
프로그램은 설정이며, 트루먼쇼와 같다. 인식관은 트루먼 쇼 영화처럼 인식관의 장막이 설정되어서, 그 인식관을 벗어나는 것은 지리상의 발견처럼 목숨을 내걸어야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동성애자들은 동성이 사랑의 대상이고, 이성애자는 이성이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의 인식이 그렇게 설정되면 그렇게 반응한다.
어떤 종교는 죽음을 각오하고 군대에 가지 않는다. 교리가 그래서 그렇다. 어떤 종교는 폭탄테러로 자살한다. 그것이 구원이라고 설정되서 그렇다. 어떤 종교는 피가름을 구원이라고 설정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어떤 종교는 집단자살을 구원으로 설정해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어야 평화가 온다고 설정이 되어 있어서 굶어죽어도 핵무기를 만든다. 굶어죽는 것도 그 나라에서는 순교다. 설정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그렇다.
종교는 자신의 종교를 ‘구원의 표준’으로 설정하고, 그곳을 벗어나는 순간, ‘지옥’에 간다고 코딩이 되어있다. 모든 종교가 동일하다. 불교도 각 종파마다 그렇고, 기독교도 그렇다. 로마 교황청은 “정교회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리까지 만들었고, “루터는 이단이고, 마귀다”라고 공식 선언했다. 교황의 권세는 예수님보다 더 막강한 중세사회에서 루터의 외침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그런데, 그 계란에 교황청이 깨졌다.
다윗의 돌팔매로 골리앗이 무너지듯, 95개조 반박문이 교황의 범죄를 들통낸 것이다. 면죄부는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하지, 교황이 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베드로가 면죄부 발급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베드로도 예수님께 빌린 것이지, 주인이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근본을 알 수 있다.
왜 이단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을까? 그것은 뉴턴역학 1법칙과 같다. 정지한 물체는 영원히 정지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영원히 움직이는 속성이 있다. 인식관은 땅과 같고, 산과 같다. 누구도 감히 움직이지 못한다. 한번 그렇게 믿으면, 그 믿음의 밖을 내다볼 창문을 잃게 된다. 절대믿음이 그렇다. 영화 트루먼쇼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믿고싶은 것만 믿고, 보고싶은 것만 보는 심리구조가 있다.
이단(異端)은 끝이 다른 것이다. 성경에서 이단의 정의를 “예수님이 육체로 임하신 것을 부인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명확히 정의했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이 구원주인 것을 부인하면 그것이 이단이고, 예수님이 육체로서 말씀을 이루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 곧 이단이다. 이단의 정의를 낯설게 생각하면 안된다. 이단의 다른 말은 거짓말이다.
누가 거짓말쟁이인가? 누가 참말인가?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나무와 열매’로 안다고 예수님이 말씀했다. 내가 자주 거론했던 양두구육(羊頭狗肉)이 여기에 해당된다. 권력자는 권력을 이용해서 지록위마(指鹿爲馬)를 강요한다.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데, 손을 드는 부류는 이권 때문이다. 이권 때문에 권력에 아부하는 부류가 지록위마에 동참하는 ‘굴종의 신앙인’이다. 하나님은 지록위마의 굴종을 허락하지 않았다. 할말은 해야지, 그것이 루터의 후예들이다.
이단의 판별법은 기준에서 다른 것이다. 여기서 기준은 ‘성경말씀’이다. 성경말씀의 근본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이단이다. 성경말씀의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주라는 것이다. 구원이 무엇인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이 구약의 감옥에 갇힌 것이다. 감옥을 여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절대불변의 진리다. 이것에서 벗어난 모든 가르침은 거짓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하시고,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의 약속을 하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셨다. 이후 2천년동안 그 말씀으로 인류문명을 진화시켰다. 말씀과 그 성취가 일체된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결국, 인생도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것이 언행일치로서 삶이다. 참과 거짓은 그것으로 구분한다. 자신이 한 말과 그 말에 대한 실천이다.
“이단”이라고 해서, 특정종파만 생각하면 안된다. 잘못된 인식관이 바로 이단의 출발점이다. 종교에 예속되어서 영혼과 구원의 사기를 당한 것이 가장 억울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적 KS 마크를 획득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구원의 첩경이다. 그냥 마음으로 믿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구원을 얻는 길이다.
하나님과 인류의 중보자로서 예수님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으로 이단을 판별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위치로서 새로운 중보자가 등장한다면 그것이 이단이다. 거짓 선지자는 선지자 명함을 내밀면서 예수님의 그리스도임을 부인하거나, 자신의 행위가 말씀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 명함을 내밀면서 예수님의 그리스도임을 부인하거나, 자신의 행위가 말씀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거짓 교사는 교사(가르침) 명함을 내밀면서 예수님의 그리스도임을 부인하거나, 자신의 행위가 말씀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누가 사기꾼인가? 말과 행실이 틀린 사람이다. 누가 약속을 지켰는가? 명예와 학식과 재물로 신뢰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약속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바로 ‘신뢰의 첫단추’이다. 성공하지 못한 모든 프로젝트가 사기라는 유명한 명언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교 프로젝트를 성실히 이행하시면서 인류와 약속을 지키셨다. 약속의 증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어찌 그것을 부인하랴.
하나님이 시작한 종교는 6천년전에 시작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이고, 영계질서의 중심자이다. 그 하나님이 시작한 최초의 종교가 에덴동산이다. 아담이 범죄했고, 그래서 4천년 형벌을 받았다. 그 감옥을 벗어나기 위해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십자가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피흘림없이 “죄를 용서한다”라고 할 수 있으면, 이미 에덴동산에서 그렇게 하시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종교도 그 질서와 법률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결코 폐할 수 없다.
만약, 누군가 신약과 십자가 사건을 폐한다면, 그 순간 구약에 갇히게 된다. 구약을 벗어나는 조건은 육신의 십자가 사건이다. 결국 죽음을 통해서 구약을 벗어나야하므로, 신약을 폐한 그 인물은 죽어야하는데,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것을 왜 또 하는가?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모든 종교는 구약에 갇히게 된다. 구약에 갇힌다는 것은 ‘권력과 재물과 제도’에 갇힌다는 의미다.
성경에는 첫아담과 후아담만 존재한다. 그런데 제3의 아담이 혹시 등장한다면, 이제 앞으로 제4의 아담, 제5의 아담, 제6의 아담이 계속 출현할 것이다. 이런 비극이 또 어디에 있는가? 첫아담은 사망을 인류에게 가져왔는데, 후아담인 예수님은 생명을 가져오셨다. 그런데, 제3의 아담이 등장하는 순간 예수님은 사망의 아담으로 추락한다. 누가 이것을 부인하랴. 그래서 아담의 변증법은 비진리다.
구약과 신약의 역사구분은 ‘중보자’를 통해서 된 것이다. 매매계약은 계약자가 1명이다. 구약의 계약은 아담이 했고, 신약의 계약은 예수님이 했다. 구약의 계약자는 아담인데, 계약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되면서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모세를 통해서 완성되었다. 최초 계약자는 변경되지 않았다. 예수님도 동일하다. 최초 계약자는 예수님이고, 베드로-바울-어거스틴-루터 등을 통해서 계약내용이 수정되면서 완성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최초 계약자인 예수님이 다시 오겠다고 한 것이다.
신약의 계약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시는 예수님인데, 계약자가 만약 변경된다면, 그것은 이중계약이 된다. 계약사기에 해당되는데, 과연 하나님께서 이중계약의 모순에 빠지실까? 계약자는 변동없고, 예수님이 오심으로 계약의 잔금을 치루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새로운 법률을 만든 것이 절대 아니다. 모세가 제정한 율법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 것이다.
어떤 종교 지도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풀이하길, “육신이 죽었으니 그것은 실패한 역사다”라고 한다. 성경을 어리석게 풀이하는 자들이다. 죽음으로 아담의 사망을 이긴 것인데, 그것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육신으로 죽지 않을 자가 어디에 있으랴.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약의 사망을 이긴 것을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그 순간, 아담의 사망에 갇히게 된다.
요한1서 4장에 나오는 이단의 정의처럼, 신약을 폐하거나, 새로운 약속을 선포하거나, 예수님의 구원주이심을 믿지 않으면 그것이 성경적 이단이다. 예수님이 구원주라는 것은 예수님 외에는 다른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순간 예수님은 부정된다. 그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영혼의 구원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