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가면(假面)은 가짜 얼굴이다. 가면무도회(假面舞蹈會)는 가면을 쓴 얼굴로 춤을 추는 사교모임이다. 남자친구 드라마에서 강릉으로 발령받은 박보검이 급하게 서울로 올라와서 가면을 쓰고 가면무도회에 참석해, 송혜교의 손을 잡아 끄는 장면이 나온다. 가면을 써도 알아본다는 그 설정, 끌림은 끌림을 당긴다. 진심은 진심으로 흐른다.
박보검이 오늘은 뭔가 큰 결심을 한다. 사랑의 표현을 하고 싶은 것, 얼굴이 노출되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가면을 벗는다. 가면을 벗어야만 서로의 얼굴로 웃을 수 있고, 입맞춤을 할 수 있고, 포옹할 수 있다.
아!! 극적인 뭉클함!! 얼굴과 얼굴이 만나야 기쁘다. 커텐이 걷혀야 요셉과 그 형제들이 재회한다. 십자가 사건후 장막이 갈라지니 인간과 하나님이 비로서 만날 수 있었다. 가면을 벗지 않으면 영원히 다른 사람, 다른 마음으로 빗나갈 뿐이다.
내가 진심을 말한다면, 나는 30년전에 새로운 그 교회가 좋았다. 오직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님을 가면으로 쓰고 온 것이 아닌, 예수님의 얼굴을 진심으로 보여준 그 말씀이 좋았다. 가면무도회가 아니라, 세상이나 기존 교회에서 가면이 씌워진 예수님의 이미지가 벗겨지고, 사랑의 예수님이 말씀으로 나타나므로 진정 기뻤다.
1999년, 내가 극적으로 신앙의 방향을 돌이키고, 새로운 신앙의 관점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가면과 형식과 가식을 철저히 경계하면서 진실된 인생을 살려고 몸부림쳤다. 2009년, 이혼을 한 후에는 털뽑힌 통닭처럼 사교성이 사라진 기자로서 작가의 고뇌를 걸어야했다. 가면쓰지 않기, 그때 내가 추구했던 삶의 방법이다. 신앙적 관점에서도 나는 나의 신앙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병적일 정도로 내가 알레르기를 갖는 단어가 ‘모사’다. 나는 이 단어를 경멸한다. ‘살’을 붙이면 ‘살모사’다. 나는 모사를 살모사와 같은 치명적 독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다. 모사는 거짓말로서, 조직의 내분을 조장하고, 스승과 제자를 이간질하며, 성도와 성도를 분열하는 첩자다. 모사는 언어의 가면이다. 가면을 쓰면, 누구도 진심을 알 수 없고, 눈빛을 쳐다볼 수 없다. 얼굴과 얼굴을 봐야하는데, 모사의 언어는 속임수다. 내가 있던 그 단체는 모사를 밥먹듯 사용했다. 그 위험성을 너무나 모르고 살고 있었다. 거짓말이 들통나면 “모사였다”라고 변명하는데, 그것조차 “모사인가?”라고 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사회가 어찌 이상세계인가?
내가 다음으로 싫어하는 것이 ‘녹취’다. 나는 누군가 녹취했다고 하면, 그 사람을 사람으로 안본다. 녹취하는 사람은 바리새인과 같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트집잡으려고 질문을 던져서 올무를 놨다. 그것이 그 당시 녹취사건이다. 사람과 사람이 언어를 사용하는 근본 목적은 마음을 현실성으로 교감하기 위해서다. 녹취를 한 상태에서 대화를 하는 것은 이미 상대방을 속인 것이다. 그런 사람은 내면의 가면을 쓴 것이다.
언젠가 설교에서 목사님이 “자신의 죄를 무화과 잎으로 가리듯, 각종 명예와 권력과 과시로서 자신의 범죄를 가린다. 지식인의 두 얼굴이다. 지적 사기꾼들이다. 속으면 안된다”고 설교하셨다. 그 설교에 정말 공감했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유약함과 죄스러움과 어리석음과 두려움’을 그리스도앞에 토설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