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내가 기자로 첫발을 디뎠을 때, 맨 처음 배웠던 것은 “가서 들어봐”였다. 직접 가라고 했고, 들어보라고 했다. ‘기사는 현장에서’가 바로 그것이다.
따뜻한 책상에서 기사가 술술술 나올 것 같은데, 전화로 확인하면 금방 될 것 같은데, 전업농 신문 사장님은 나를 “가서 들어봐!!”라고 했다. 그 사장님의 속내는 직접 가서 만나야만 ‘광고’가 나오니까 나를 보낸 것인데, 그 사장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연단시킨 것은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기자 저널리즘은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이었다. 언론사 사장님과 관점이 틀렸을 때, 나는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내가 쓴 글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만 둔 회사가 재건축재개발신문사다. 지나고보면, 내가 최고의 고급과외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현장만큼 탁월한 교실은 없다.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에서 정말로 어려울 때가 있다. 내가 취재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내게 들려올 때다. 그때 나는 귀를 막는다. 내가 사건을 접수하면, 나는 취재를 진행하게 된다. 나의 취재방식은 반드시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에 맞게 진행된다. 특별한 예외사항이 간혹 존재하지만, 대부분 양측의 주장을 모두 확인하고서, 퍼즐을 맞춰서 사실의 내면을 공개한다.
성경계시도 이와 같다. 간혹 내게 계시를 보내오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있었던 곳은 계시를 받는 사람들이 많았고, 계시국이 있었다. 계시국에서 ‘OK’하면 그것이 계시가 된다. 그것은 계시국에서 허락한 인문학적 계시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성경에 근거한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계시는 ‘좋은 말’에 불과하다.
가령, 내가 하나님께 뭔가를 놓고 기도했다. 그랬더니, 다음날 신기하게도 그 기도가 사람을 통해 이뤄졌다. 그리고 내 인생은 점점점 방향이 틀어지더니, 루비콘강을 건너게 됐다. 이 과정에서 나는 ‘떠남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성경적 계시’다.
어떤 묵시가 온다는 것은 새로운 정보가 온다는 것이다. 정보는 대부분 사람을 통해 온다. 그때는 반드시 확인해야한다. 요시야에게 이집트의 바로가 새로운 군사정보를 가지고서 ‘군사동맹’으로 접근했다. 성경적 근거를 찾아야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왔을 때는 확인해야한다.
내가 있었던 곳에서 이 사건을 ‘무지속의 상극세계’라고 교육하는데, 인생은 요시야가 될 때가 있고, 느고가 될 때가 있고, 갈그미스가 될 때가 있고, 앗수르가 될 때가 있고, 바벨론이 될 때가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느고’가 되고자 하고, ‘바벨론’이 되고자 한다. 갈그미스나 요시야가 되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인식관 자체가 하나님과 무지속의 상극세계다.
생활속 사소한 계시는 작은 골목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선 것과 같아서 차를 돌리면 금새 빠져나온다. 그러나, 구원과 관련된 문제는 영원한 문제를 좌우한다. 구원에 대한 정보는 반드시 확인후 결정해야한다. 신앙에서 확인은 실제와 성경과 계시의 3박자가 맞아야한다. 계시를 받았고, 그 계시가 실제로 이뤄졌다고 해도, 성경적 근거가 없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예수님의 3대 시험에서 마귀가 제안하고, 예수님은 거절했다. 그 이유는 성경적 근거가 아니라서 그렇다. 마귀가 권력과 영광을 준다고 했을 때, ‘절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면, 마귀가 줬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귀가 하나님의 계시를 준 것인가? 결코 아니다. 성경에서는 굴종의 우상신앙을 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을 절대화하는 신앙은 우상숭배다. 위대한 영도자 모세조차 자신을 섬기는 굴종의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다. 아론이 황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거기 절하게 만들었다.
한국에는 너무 많은 이단이 즐비하다. 모두 자신들이 맞다고 하니, 그처럼 불행한 뉴스는 없다. 모두 비슷비슷한 교리를 가지고 주장하니, 이 또한 숙명여대 쌍둥이 답안지 사건처럼 요상스럽다. 괄호안에 사람 이름만 다를 뿐, 거의 흡사한 풀이과정들이다. 왜 이런 사태가 계속 발생하는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는 성경을 통해서 해당 정보를 확인해야만 결코 속지 않는다. 성경은 신앙길을 찾아가는 가장 안전한 영적 지도요, 나침반이요, 네이게이션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