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기독교는 그리스도교의 한자음역이다. 기독(基督)이 그리스도와 같고, 번역의 뜻은 근본의 감독관이다. ‘총독의 근본자’로서 로마 황제에 버금가는 신권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사명을 받은 자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사명자다”의 줄임말이다.
성경에 모든 영을 함부로 믿지 말고, 하나님께 속했는지 시험하라고 했다. 시험은 곧 분별을 뜻한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서 3대 시험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 사건은 신앙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깊이 묵상함으로 각자 그 과목을 통과해야한다. 또한 영들을 분별함에 있어서 기준점이 된다.
‘마귀’가 시험했다고 하는데, 그 마귀가 목사가 될 수도 있고, 교주가 될 수도 있고,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황제가 될 수도 있다. 대통령이 될 때는 엘리야 시대였고, 모세 시대였다. 엘리야 시대에는 아합왕이 마귀가 되어서 부국강병을 앞세워서 하나님을 시험했다. 바로왕도 마찬가지다. 루터 시대에는 교황이 마귀가 되어서 면죄부를 남발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섭리를 삭제했다.
모든 이단들에 속한 성도들은 ‘교주’가 마귀가 되어서 시험한다. 마귀는 세상부귀 영화를 주겠다면서 ‘절하라’고 한다. 그때 절을 하면, 마귀의 사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부정하게 된다. 예수님의 모든 정답은 ‘성경말씀과 하나님’이다. 그래서, 성경말씀과 하나님을 절대시하는지 그것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성령이다” “내가 메시야다” “내가 재림주다” “내가 보낸자다” “내가 아담이다”라고 주장할 수는 있다.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섬김의 삶을 다했다.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몸을 아끼지 않았다. 사명은 곧 사랑의 강령이지, 권력의 도구가 아니다. 이것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자신의 사명으로 권력화하고, 도구화하고, 굴종의 신앙을 강요하고, 구원을 앞세워 성도를 겁박한다면, 그것은 마귀의 신앙이다. 절대로 속으면 안된다.
취재를 다녀보면, 한국은 별놈의 단체가 많아서 모두 ‘대표’이고, ‘회장’이고, ‘사장’이다. 나도 서울교육방송 대표다. 아주 작은 회사인데, 이름은 그럴듯하다. ‘회장’과 ‘대표’의 명함을 받았을 때, 반드시 분별해야한다. 그 직함만 가지고, ‘대그룹 회장’으로 대우를 하듯 영접하면 절대로 안된다. 속은 것이다. 이름을 보고 판단하면 절대로 안된다. 누구나 ‘회장이다’라고 주장할 수는 있는데, 무슨 회장이냐고 따져야한다. 조기 축구회 회장도 회장이다.
만약 그리스도 명함을 사용한다면, 무슨 그리스도인지 따져야한다. 기름부음의 사명이 무엇인지 논해야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담의 범죄로 갇힌 백성의 죄에서 자신의 백성을 건져내기 위해서 왔다고 소속을 밝혔다. 그리고, 율법이 정한 규정대로 값을 치루고서 백성을 구원하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루터가 교황에게 물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교황 당신의 죄는 누가 사했습니까?” “교황 당신의 구원주는 누구입니까?” “그대의 구원주는 누구입니까?”
내가 30년 동안 소속한 단체에서 나는 수많은 질문을 품고 살았다. 해갈되지 않는 갈증의 사막에서 선인장처럼 움츠리며 신앙을 지켜왔다. 질문의 가시중 하나가 이것이다.
“구원의 사명을 받은 그는 누구를 구원주로 고백하나?” “예수님이 그의 구원주인가? 그는 스스로 구원주인가? 아담의 범죄에서 그를 꺼낸 구원주는 누구인가? 지금 현재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나?”
예수님을 구원주로 시인해야, 그 예수님에게서 사명을 받을 수 있다. 구원의 사명을 받으셨다면, 그 역시 예수님을 구원주로 시인해야 가능한 일이다. 구원주로 시인하는 것은 입술고백이 아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말씀의 육신화 과정으로 예수님의 향기가 스며야한다. 그 순수했던 첫신앙의 그때처럼!! 그리하여 요즘 나의 구원주는 예수 그리스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