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변곡점때마다 ‘말세현상’에서 허우적댄다. “누군가 나타났다”는 유언비어가 진실보다 더 강력한 속보로 찾아온다. 이단들이다.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한다. 역사를 모르면, 보이스 피싱처럼 당한다. 지금의 단면은 역사의 언젠가와 같다. 역사를 통해서 지금을 해석하면, 분별된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으로 결국 창세기의 ‘옛뱀’이다. 유물론은 신본주의를 없애기 위해서 출현한 짐승의 사상이다. 아무리 완벽한 구조물로 이론이 설명되어도, 그 본질은 짐승의 사상이며, 계시록에서 말한 ‘우상’이다. 거짓 선지자-짐승-우상의 원본은 ‘용’이며, 그 용은 창세기의 옛뱀이다.
계시록의 마지막 문장은 ‘주 예수’로 끝난다. 마지막 문장의 주어는 ‘주 예수’다. 다시 온다는 인물도 ‘주 예수’다. 2천년동안 수많은 이단들은 계시록의 마지막 문장의 주어를 바꿔서 설명한다. 이적과 기적과 명성과 권력과 논증을 가지고서 설명해도, 마지막 문장의 주어가 바뀌면 그는 적그리스도요, 거짓 선지자다. 도덕적 인품을 소유했어도 동일하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미 주 예수는 오셨다. 그 증거는 일곱 교회다. 성경에 등장하는 일곱교회에 주 예수는 “내가 속히 가서 심판하리라”고 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일곱교회는 사라졌다. 과연 그 교회에 주 예수가 가지 않았을까? 사도 바울에게 나타난 부활의 주님께서 가지 않았을까?
계시록에 등장하는 ‘바벨론’은 누가 뭐래도 ‘로마제국’이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핍박을 받고서, 로마법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았다. 이후 300년동안 로마황제들은 기독교인을 숙청했다. 순교의 피가 로마역사에 강물처럼 흘렀다. 요한계시록은 로마시대를 의미한다. 그런데, 로마제국은 멸망했다. 이미 계시록의 예언이 이뤄졌다. 주 예수가 오셨던 것이다.
일곱교회에 이미 찾아가셨듯이, 주 예수는 항상 우리를 찾아오신다. 십자가 사건에서도 주 예수는 금요일에 붙잡히시고, 일요일 새벽에 부활해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렇게 빨리 찾아가시는 주님이시다. 2천년동안 묵묵부답하시는 주심이 아니다. 일곱교회를 찾아가듯이, 일곱 교단을, 일곱 나라를, 일곱 종파를 찾아가시는 주 예수이시다. 아멘!!
영원한 현재에 살고 계시는 주 예수는 지금도 오신다. 현대사회는 성담론으로 변장한 신막시즘이 신본주의를 위협한다. 창세기의 옛뱀은 하와를 유혹해서 선악과를 따먹게 했다면, 현대사회의 옛뱀은 창세기의 설정 자체를 변경하려고 한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섭리인데, 성소수자 인권보호라는 법적 논리로 ‘동성연애’가 보편적 문화로 허용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창세기에 하와가 하와와, 아담이 아담과 결혼할 수도 있다는 논리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주로 숭배하는 우상숭배와 같다.
이것이 자유인가? 이러한 자유는 창세기 1장 1절에 묘사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는 상태’이다. 로마 제국은 멸망했으나, 새로운 권력과 인본주의와 우상들이 등장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신권을 위협하면서, 계시록의 드라마가 반복되는 것이다. 계시록은 결국 ‘주 예수’가 정답이다. 아멘!!
[로마서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듯, 남자와 여자의 위치를 바꾸어서 남자가 남자와 사랑을 하는 것이 역리다. 그와 같이, 계시록의 맨 마지막 문장의 주어는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인데, 주어의 자리에 다른 이름이 들어오는 것이 곧 역리다. 이단과 적그리스도는 이것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주어가 바뀌면, 성경의 끝이 바뀌므로, 알파와 오메가에서 오메가를 바꾸는 것이다. 결단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이단(異端)은 끝이 다른 것이다. 계시록은 재창조 섭리인데, 끝은 ‘주 예수’이다. 이것을 망각하면 절대로 안된다. 주 예수는 대체 불가능한 ‘정관사’임을 명심해야한다.
[계시록 22:21_성경의 마지막 문장]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