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나는 10년 넘게, 16년동안 언론인으로 살면서 ‘사실과 사실확인’에 훈련을 받았다. 사과나무는 사과만 열리듯, 나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을 추구하면서 살았다. 내게도 편견이 있지만, 그 편견의 안경을 벗어야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할 때도 많다.
나는 명지대 정지윤 교수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4~5년 넘게 신뢰를 구축해온 인간관계의 틀은 가치관이 비슷한 덕분이다. 맨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다문화의 본질을 배웠다. 다문화는 베트남 여성이나, 조선족이나 탈북자를 지칭하는 저속한 표현으로, ‘다문화’라고 지칭하는 것은 ‘조센징’이나 ‘빨갱이’라고 지칭하면서 자국민 우월사상을 갖는 것이다. 정지윤 교수님은 “내국인을 배제한 다문화 정책은 쓸모가 없다”라고 단정했다. 이유를 들어보니, 타당했다. 외국에서 우리나라에 살려고 들어왔는데, 내국인이 외국인을 이방인 취급하면서 배제하면, 이방인은 살 땅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 따르는 청중들에게 “소금과 빛이 되어라”고 하지 않고, “소금과 빛이다”고 하셨다. 첫 설교를 마치시고, 그 기념으로 선언하신 축복일까? 어쩌면, 예수님의 위대한 인식관은 “소금과 빛이다”고 인정하심에 있을 것이다. 다문화도 그렇다. 한국에 들어왔으면, “한국인이다”라고 인정해주면 된다. 그 외에 무슨 필요가 있으랴. 그런데, 한국인은 그들에게 “한국인이 되어라”고 강요한다. 여전히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인은 스스로 한국인임을 무엇으로 입증할까? 부모가 자식을 낳고서 “너는 내 자식이 되어라”고 하는가? 낳자마자 “내 자식이다”고 한다.
그처럼, 우리는 ‘나’를 ‘나’로 인정한다면, ‘너’를 ‘너’로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한다. 그것이 사람과 사람의 기본적 신뢰관계이다. 진정성(眞情性)은 진실한 감정의 성질을 줄임말인데, 진짜 감정을 뜻한다. 감정중에 진짜 감정이 있나? 강조법이다. 진정성은 진실한 마음을 뜻한다. 진정성의 반대말은 거짓말이다. 가면을 쓰고서 마음에 없는 말을 하면 그것이 모사요, 거짓이요, 사기다. 최소한 자신을 속여서는 안되며, 더불어 상대를 속여서도 안된다.
동방박사가 찾아왔을 때, 헤롯은 거짓말로 “경배할테니 알려달라”고 했다. 진정성이 없는 것이다. 반면, 동방박사는 마굿간에 있는 아기 예수를 본 후에 자신이 준비한 예물을 드렸다. 이것이 진정성이다. 자신들이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의 사실을 접했지만, 자신들이 확인한 그 별이 지시한 곳에 아기 예수가 있었으니, 인정한 것이다. 헤롯은 사실을 덮고, 제거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조작하고, 동방박사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정함을 알 수 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이나 정보를 만났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떤 부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