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사랑은 무엇인가? 한없이 주고 싶고, 주는 것이다. 소유는 무엇인가? 한없이 갖고 싶고, 갖는 것이다. 사랑과 소유(욕심)은 양립불가의 존재다. 어둠과 빛처럼, 생명과 사망처럼, 상호대립의 관계이다. 동쪽으로 가면서 서쪽으로 갈 수 없고, 말하면서 먹을 수 없다. 숨을 뱉으면서 마실 수 없다. 사랑과 소유는 정반대다. 사랑하면, 소유를 주는 것이다.
十 덧셈기호로 익숙한 십자가의 의미가 오늘도 새롭다. ‘저주의 십자가’, ‘형틀의 십자가’는 다름 아닌 ‘사랑의 십자가’이다. 모두 같은 십자가인데,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보일 뿐이다. 저주의 십자가는 곧 영광의 십자가이다. 섬김의 권력은 그 정점이 십자가로 종결된다. 십자가의 다른 이름은 ‘하나님의 명령과 섭리’를 의미한다.
계시록에 보면, 용과 짐승과 우상과 거짓 선지자가 나온다. 이들의 공통된 특성은 ‘뿔’과 ‘지배’다. 뿔은 권력이며, 1이다. 뿔 각(角)은 피라미드가 우뚝 솟듯이 1등을 향해 올라간다. 하늘처럼 높아지길 바라는 마음, 그것이 뿔이다. 1등만 살아남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하나님은 2등이 되거나, 꼴등이 되어야 1등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섬기는 권력의 속성이다.
권력과 사랑은 양립불가다. 그런데, 사랑하는 권력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인자의 권력이며, 베푸는 권력이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백성을 섬겼다. 대통령은 백성이 뽑았다. 그런데, 백성을 섬기지 못한다. 섬겨야하는데, 여전히 백성위에 군림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의 형체로 오셔서, 백성과 제사장과 정치인까지 섬김으로서 저주의 십자가에서 ‘사랑과 용서의 왕’이 되셨다.
내 것을 더 채우고 싶은 마음, 그것이 욕심이다. 내 땅을 더 넓히고 싶고, 내 건물을 바벨탑처럼 더 올리고 싶고, 내 지식을 더 확장하고 싶고, 내 인맥을 더 많이 연결하고 싶고….. 소유의 지평을 끝없이 확장하길 원하지만, 모두 욕심이다. 뿔(1)의 모습이다. 용과 짐승은 사랑을 받는 존재로서,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권력의 형상이다. 인자의 권력은 항상 사랑이요, 용서요, 베품이요, 나눔이다. 짐승의 권력은 소유요, 뺏음이요, 받음이요, 지배요, 통제다.
십자가의 덧셈기호는 절대로 해체되서는 안된다. 덧셈기호가 해체되면, 1과 一이다. 모두 1등이다. 1등이 되고싶은 마음이 바로 짐승의 권력이다. 1은 뿔이고, 一은 한자로 ‘1’이며, 또한 창이다. 창은 서로를 공격하는 찌름이다. 오직 십자가는 모든 1등을 연합하고, 서로 베풀면서 사랑하는 놀라운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내 것을 포기하는 마음, 그것이 사랑이다.
동방박사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3가지 선물을 가지고서, 별의 주인되신 유대인의 왕을 찾아 모험의 길을 떠났다. 유대인의 왕은 헤롯대왕이 있었으나, 별이 말하는 그 왕은 아니었다. 선물을 주고 싶은 그 순수한 마음이 곧 별이 되어 아기 예수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한 비밀이다.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에게 줄을 섰다. 제사장과 율법학자는 헤롯대왕에게 줄을 섰다. 과연, 살아가면서 아기 예수와 헤롯 왕이 극명하게 대립될 때, 아기 예수의 편에 설 수 있을까? ‘권력과 죄인’의 극명한 대립구도에서 죄인의 편에 설 수 있을까? ‘교황과 루터’의 극명한 대립구도에서 루터의 편에 설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오직, 성령으로 행할 때 가능하다. 그래서 인생은 반드시 기도해야한다.
기도는 나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양심선언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행에 대출을 부탁받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