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밖에 나섰다가 다시 돌아왔다. 까페도 추위가 엄습하였다. 집이 가장 안전하고, 따뜻하다. 올 겨울 가장 추운 날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집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드라마와 묵상과 글을 쓰면서 보내야겠다.
성경을 읽는 다양한 방법중에서, 예수님의 방법은 말씀과 행함이다. 예수님은 말씀을 현실에 적용해서 실천하시는 신앙방법을 제시했다. 고향에서 이사야서를 읽고서, “오늘 이 성경이 이뤄졌다”라고 선포하신 장면은 드라마틱하다. 말씀을 현실에서 살아가신 것이다.
설교(說敎)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설교를 하셨다. 說은 말할 설(說) 敎는 가르칠 교(敎)이다. 창세기를 한문성경으로 보면, “가라사대”를 ‘說’로 번역했다. 신설(神說)로 되어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 창조역사가 진행됐다. 왕이 명령하면, 정책이 실현되듯 창조역사의 프로그램이 진행됨을 알 수 있다. 說이 바로 창세기의 말씀을 뜻한다. 兄은 제사장이며, 八은 제사장이 팔을 올린 모습으로, 축도하는 모습이다.
敎는 孝를 가르친다는 의미다. 설교는 말씀의 교육이다. 말씀은 창조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다. 학교의 주입식 교육은 지식을 넣지만, 설교는 진리의 빛을 비춤으로 이미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것이다. 설교의 창조역사는 곧 성령의 보호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에, 베드로는 제자들중에서 최초로 예수님을 깨달은 1등 수제자였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이 발생하고, 가장 참혹한 성적표를 스스로 인정해야했다. 부활의 주님을 맞이하고서도 고향에 낙향해 디베랴 호수에서 어부로 살았던 이유는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40일의 부활기간 중에 베드로는 2번 예수님을 만났다. 그때, 베드로는 정말로 부활했다. 그리고 베드로가 달라진 모습은 성경으로 복귀다. 성경을 묵상하고, 성경으로 설교하고, 성경으로 권면하고, 성경으로 행하였다. 성경말씀은 이처럼 중요하다.
1.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3.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계시록 11장이다. 나는 30년 넘게 이 말씀을 잘못 이해했다. 지금은 진리의 지평을 확장해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몰랐을 때는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좁은 견해’를 ‘옳은 진리’로 쳐다볼 수 밖에 없다. 진리는 빛과 같아서 들음으로 인식의 동굴을 벗어날 수 있다. 고정관념의 동굴에 갇혀서 나오길 거부하면 진리의 빛도 무효할 수 있다.
대부분 이단은 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을 인물로 해석한다. 증인(證人)이니, 사람으로 푸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2천년동안 계시록 11장은 인봉되었는가? 이단교회의 특정 두 인물이 오기까지 계시록 11장이 무의미한 것일까? 두 증인을 두 사람으로 풀게 되면, 억지 해석이 된다. 이런 성경해석은 우물안 개구리 해석이다. 자신들만 맞다는 아전인수격 해석이며, 확장성이 사라지며, 선민사상의 나르시즘에 빠지는 지식의 바벨탑이다.
지팡이 같은 갈대는 곧 측량하는 자를 뜻한다. 목수는 줄자를 가지고 일한다. 성전을 건축하거나 집을 지을 때는 측량함으로 설계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성도들을 척량한다는 것은 ‘성전과 성직자와 성도’를 보호한다는 뜻이다. 보호는 말씀의 측량이다. 측량을 심판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말씀의 효력 때문이다. 말씀이 없으면 보호도 불가능하다. 말씀을 지키면 성전안에 속하고, 말씀을 범하면 성전밖에 속한다. 진리로서 자신의 마음과 행실을 측량해야, 보호를 받게 된다. 오늘 내가 말씀속에 있는가? 그것으로 성전안에 속했는지 알 수 있다. 성전밖은 외부에서 보는 교회를 뜻한다. ‘나’는 하나님앞에 ‘나’와 세상속에서 ‘나’가 다르다. ‘나’는 하나인데, 하나님과의 ‘나’가 있고, 세상속에서 ‘나’가 있다. 그와 같이, 교회도 하나님앞에 ‘교회’가 있고, 세상속에서 ‘교회’가 있다. 성전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교회이며, 성전밖은 세상속에서 교회를 뜻한다. 2개의 교회가 바로 두 증인이다.
이단 교회가 두 증인을 두 인물로 푸는 것은 계시록 11장 6절 때문이다.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가뭄선포는 엘리야 시대이고, 물이 피가 된 재앙은 모세 시대다. 그래서 두 증인은 엘리야와 모세라고 푸는 것이다. 엘리야는 영적 증인, 모세는 육적 증인으로 푼다. 그 해석이 옳다면, 그와 같이 성전안과 성전밖으로 해석함이 합당하다. 성전안이 곧 영적 교회, 성전밖이 육적 교회로 표현될 수 있다. 결코 두 증인은 두 인물이 될 수 없다.
엘리야와 모세는 시대가 전혀 다르다. 광화문 광장에 서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동상이 서로 다른 시대 인물이듯 그렇다. 우리는 조선을 대표하는 두 인물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꼽는다. 두 인물은 곧 왕족과 신하를 상징한다. 또한 백성을 향한 은덕과 왕을 향한 충성을 상징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보편적인 상징해법이지, 조선을 통틀어 세종대왕과 이순신만 최고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설명이다. 두 증인을 두 인물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것으로도 알 수 있다.
두 인물로 보면, 권세를 잡는 기간도 인간의 수명을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하나님은 영원하신 영존자이시고, 지구의 나이만 47억년이 넘는데, 기껏 인간의 수명 100년에 맞춰서 권세를 준다면, 나머지 기간은 어쩌란 말인가? 결국, 엘리야와 모세는 단지 샘플로 보여준 것이고, 구약 전체 기간동안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호하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이스라엘, 세상속에서 이스라엘이 바로 두 증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담당했던 것이다.
성전안을 측량하고, 성전밖 마당은 그대로 두라고 했는데, 교회가 반대로 할 때가 많다. 마치 겉을 더 신경쓰듯이 사회봉사에 보다 집중하면서 정작 성도들의 신앙에 소홀할 때가 많다. 척량은 오직 “성전안”이고, “성전밖”이 아니다. 콘스탄틴 대제가 전도된 것도 성전밖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성전안의 기적이다. 성전안을 척량함으로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하고, 그 복음이 전파되어서 콘스탄틴 어머니가 복음으로 전도되어서 왕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성전안의 역사이지, 성전밖의 역사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교회가 하나님앞에 어떠한가? 말씀으로 온전히 서있는가? 말씀의 생명수가 오늘도 흐르는가? 제단의 불이 오늘도 뜨거운가? 성도들에게 말씀이 진실로 전달되는가? 그 심령가운데 말씀의 측량이 이뤄지고 있는가? 측량이 되면, 버릴 것 버리고, 쓸 것 쓰게 된다. 인생이 정리정돈이 되면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설계와 건축이 시작된다. 오직, 말씀으로 성전과 제단과 성도들에 집중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