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콜롬비아에서 마약왕 파블로가 있었다.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어서, 돈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인물인데, 검은 돈으로 정치인이 되려고 한다. 마약왕이 스스로 낮아져서,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면서 허탄한 욕심을 챙기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가진 것으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욕은 깨진 독과 같아서 채워도 채워도 만족이 없다. 행복은 만족을 알 때 느껴진다. 행복은 ‘졸업장’과 같다. 크고 작은 사건에서 ‘만족의 감사’를 할 때 깊은 행복감이 속에서 솟아오른다. 불만족하면, 행복도 생기지 않는다.
마약왕은 신흥갑부로서 가족과 동료와 자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자와 권력으로 눈을 돌린다. 권력은 마치 알렉산더와 같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아버지가 암살당하고, 갑자기 앉게 된 그 권좌로서 그리스를 평정하고, 위대한 대제국을 건설한다. 그러나, 죽었다. 제국은 쪼개졌다. 권력은 이와같다. 내 것인 것 같지만, 남의 것이 되는 것, 그것이 권력이다.
여자 뉴스 앵커가 마약왕을 만나면서, 마약왕의 정계진출이 점점 가시화된다. 언론의 권력이 이처럼 무섭다. 유부녀였던 뉴스 앵커는 마약왕을 인터뷰하면서, “그가 돈을 어떻게 벌든 그것은 상관없다. 좋은 일에 쓰니까”라고 스스로 최면을 건다. 거짓에 마취되면서 양심이 마비된 것이다. 나중에는 좋은 일에 쓰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파블로의 불법을 비판하지 못한다. 이유는 하나다. 파블로가 자신의 옷을 사주고, 차를 사주고, 현금을 트렁크에 담아주므로…. 파블로가 사람을 죽여도 문제되지 않은 것이다.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파블로가 돼서 그렇다. 마약왕이 얼마나 무서운가? 미투운동이 일어나는 것도 결국에는 양심과 법률과 최소한의 정의가 무너졌을 때 불법이 마약처럼 번짐을 말해주는 것이다.
마약왕과 여자 뉴스앵커는 상부상조 관계다. 마약왕은 여자를 얻어서 언론을 통한 명예를 얻고, 여자는 불법을 묵인함과 악을 좋게 묘사하면서 돈을 얻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꿈을 실현해주는 존재가 바로 마약왕이다.
파블로는 “나 외에 다른 왕은 없다”는 권력욕의 최첨단 사상을 가졌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을 섬겨라”고 하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고 요한은 증언한다. 더불어, 예수님은 백성들을 섬기면서 죽기까지 사랑을 실천하셨다. 희생과 헌신의 상징으로서 ‘소금과 빛’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파블로의 철학과는 정반대다. 파블로는 스스로 왕이 되어서 성안에 존재하며, 자신의 말에 복종하면 축복하고, 거부하면 죽여버린다. 또한 파블로는 자식에게 교육하길, “마약왕은 마약으로 돈을 벌지만, 절대로 마약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얼마나 모순인가? 사랑의 왕이신 예수님은 스스로 말씀을 행함으로 당신의 왕국을 완성하셨다. 마약왕은 자신조차 마약을 하지 않으면서 그 마약을 하도록 청소년들에게 뿌린다. 정말로 잘못된 것이다. 마약왕 파블로는 결국 자신을 반대하는 자를 죽이고, 살해하면서, 대통령과 원수가 되면서 콜롬비아는 내전에 돌입한다. 싸움은 끝이 없다. 돈이 필요한 청소년들은 파블로의 돈을 받고 경찰과 군인을 암살하고, 경찰과 군인은 그런 청소년들을 학살하고, 파블로와 대통령은 각자와 성에서 리모콘만 움직일 뿐, 죽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불법은 불법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거짓은 거짓일 뿐이다. 어떤 변명도 필요없다. 한에녹의 영원한 복음은 거짓 복음이다. 거짓에 기초한 모든 이론은 모래성에 불과하다. 첫단추가 잘못 되어서 그렇다. 마약왕을 보면서, 첫 시작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한에녹이 틀린 이유는 간단하다. 미운물건이 무엇인지, 다니엘서에 이미 나와있다.
[다니엘서 11:31]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운 사건, 에피파네스 BC167)
다니엘서 12장은 11장에서 이어지는 예언으로, 11장은 역사적 사건이 명확하다. 사실, 11장의 구체적 서술 때문에 다니엘서는 위작이라는 논란이 끝없이 제기된다. 마치 정감록과 같다. 정감록은 ‘예언사상’으로 둔갑한 ‘정권 홍보책자’이다. 그런데, 그 정감록이 다시 예언서로 인용되면서 지금까지 이곳저곳에 활용된다. 예언서가 이렇게 무섭다. 다니엘서 11장 3절의 ‘능력있는 왕’은 알렉산더 대왕이며, 알락산더의 갑작스런 죽음은 헬라제국이 4개로 분열된다. 다니엘이 봤던 4마리 짐승은 곧 짐승의 세상권력을 말하는데, 각각 사자-곰-표범-열뿔 짐승이다. 각각 바벨론-메데-헬라-로마를 말한다. 마카비 혁명을 통해서, 다니엘서 11장과 12장은 이뤄진 것이다. 제우스 신상이 없어졌으니 예언이 성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운물건을 688년으로 푼다고 하면, 다니엘서 8장 14절을 어떻게 해야하나?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때까지 이를꼬 하매, 그가 내게 이르되 2300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688+2300=2988년이 된다. 그때까지 성소는 짓밟힌다는 것인데, 얼마나 어이없는 결론인가? 이미 제우스 신상이 사라진 마카비 혁명과 그 이후 성전 청결작업으로 다니엘서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