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異邦)과 이단(異端)은 모두 다를 이(異)다. 異는 탈을 쓴 무녀의 모습을 본떴다. 제사장의 모습을 말한다. 그들은 구별된 특별한 존재였다. 이방인은 외국인이다. 내국인과 다른 존재가 외국인이다. 하나님은 성경적으로 이방인이다. 하늘나라는 입체적 외국이다. 그곳에서 땅에 오면, 천사(天使)라 추앙받았으나, 그 자체가 구별된 타자(他者)로서 이방인이다. 함께 살 수 없는 영원한 이방인, 천사(天使)다.
다문화는 내국인과 외국인이 서로 어울어지는 정책인데, 다문화 정책이 제대로 되지 않는 근본적 이유는 내국인의 인식관 구조 때문이다. 내국인이 이미 다문화를 ‘다문화의 차별’로서 규정함으로 내국인과 외국인은 영원한 벽이 생긴다. 무서운 일이다. 마치 유대인이 이방인을 장벽으로 치듯이 그렇다.
예수님은 “너희는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지 않았다. “너희는 소금이고, 빛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선언적 명제로서 어떤 조건없이 은혜를 주신 것이다. 다문화 정책에도 이러한 파격적 포용이 필요하다. 다문화 가정은 이미 그들의 나라를 버림으로 한국에 정착했다. 그 자체만으로 한국인이다. 한국어를 못해도, 한국문화를 이해하지 못해도 이미 한국인이다. 우리는 다문화 자녀와 가정을 “한국인으로서” 인정해야한다. 그것이 다문화 가정과 어울리는 첫 번째 덕목이다.
북한에서 한국에 살려고 넘어온 탈북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사상적 감시자’들이다. 탈북자는 이미 북한을 버림으로 한국인이다. 그들의 청춘이 북한이나 중국에서 사용될 수도 있는데, 스스로 선택해서 결정한 곳이 한국이다. 그러한 결정만으로 우리는 탈북자는 기꺼이 한국인으로 인정해야한다. 어떤 조건으로 시험에 통과해야 한국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탈북자는 영원히 탈북자이다. 탈북자는 그냥 한국인이다. 한국에서 같이 살고 있으면 한국인이다. 한국에 살면서도 각양각색 별의별 족속들이 많은데, 우리는 그들의 사상을 검열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유독 탈북자의 사상은 현미경처럼 점검한다. 어리석은 조치다. 이해심이 너무 부족한 우리의 자화상이다.
사람이 살고 못사는 것은 사상때문이 아니다. 사랑 때문이다. 사상은 깡마른 뼈와 같고, 살은 포근한 살과 같다. 은혜의 살이 있어야 사람은 풍요롭게 살아간다. 사상과 이념은 사람을 삭막하게 할 뿐이다. 이방인이 내국인과 함께 어울어져 살아가는 세계가 바로 이상세계다.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념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취미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가치관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어져 살아가는 세계가 이상세계다. 이상세계가 이뤄지려면, 예수님의 세족식처럼 ①겉옷 벗기 ②수건 두르기 ③대야에 물 뜨기 ④발에 붓고 씻기 ⑤수건으로 닦기를 실천하면 된다. 이것을 하려면 서로 동등된 자격이 되야한다. 서로의 존재를 존재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알고보면, 이 땅의 사람들, 지구행성의 모든 사람들은 천국에 대해 초라한 이방땅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