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몰랐을 때는 십자가를 보면 죽음이 보였다. 알았을 때는 생명과 영광이 보였고, ‘나의 죄와 죽음’이 보였다. 상징은 다양한 중첩현상을 일으킨다. 빛은 하나이나, 물질로도 보이고 파동으로도 보인다. 빛은 파동이면서 물질(입자)이다.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다. 사람이신 하나님으로 이 땅에서 살다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의 죽음이 예정에 없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진리를 부정하는 표현이다. 모든 인생은 탄생과 함께 죽음이 예정된다. 그것이 선분으로서 인생이다. 선분(線分)은 시작점과 끝점이 존재하는 ‘길이’다. 100년은 100cm에 불과한 짧은 단위다. 주님은 장수하셨으리라. 그러나 언젠가는 끝을 맞이하셨으리라. 독배를 마시고 죽음의 길을 선택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보다 위대하게, 주님은 하나님이 주신 잔을 받으셨다. 모든 인생이 태어나면서 죽음을 예고하듯, 주님은 태어나면서 십자가의 길을 향하셨다. 요한은 인생이 살아갈 길에 대해 잔잔한 문체로 서술하고 있다. 어떤 격동의 단어, 분노의 단어, 파도치는 감정의 언어를 모두 배제하고, 담담히 서술한다. 요한복음 18장에서도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에 찬 기도도 없다. 당신을 파는 유다까지 시나리오에 예정됨으로 넣었다고 표현하시는 서술처럼, 주님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다.
언젠가 목사님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인생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 진실로 고뇌하고, 준비해야한다”라고 말씀했다. 진실로 공감했다. 하루를 살아도 잠자리의 무덤에 들어가기전에, 반성의 세족식을 해야한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로서 자신과 가족과 교회와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한다. 그러한 진실의 눈물속에서, 참회의 통곡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십자가에 속박당하여 은혜의 쇠사슬에 묶여서 하루를 마감해야한다. 나는 오늘 어떻게 죽을 것인가? 새벽에 이미 결정된다. 중학교 1학년때 대학교가 이미 결정되듯, 신입사원때 그 사람의 퇴사가 이미 결정되듯이, 인생은 생일날 제삿날이 정해진다. 제삿날을 염두하지 않는 인생은 슬픈 인생이다. 죽음없는 삶이 어디에 있으랴. 아!! 그래서 잔치집보다 장례식에 다니라고 전도서는 권면하였던가?
[전도서 7장]
2.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3.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4.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나무가 새로운 땅에 옮겨심김으로 뿌리의 몸살을 앓듯이, 내 신앙은 옮겨심김으로 고난속에서 새로운 축복을 경험한다.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혜는 말씀의 풍성함이다. 환란이 있었으나 그 속에서 은혜가 함께 다가왔다. 어느새 나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가며,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려고 겸허히 묵상한다.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마지막을 제자들과 끝까지 함께 하셨다. 아!! 그 아름다운 성품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시고, 하나님과 끝까지 함께 하신 고단한 하루를 보내셨다.
그가 죽을 것을 몰랐거나, 그 죽음을 거부하셨다면 일찌감치 숨을 곳이 많았던 사마리아와 갈릴리로 피신하였으리라. 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이미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셨던 것이다. 이미 마귀를 이기셨기에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해도, 이미 마귀를 이겼으므로, 판결이 확정되는 것이다. 이기심의 증거는 마태복음 4장의 3대 시험이고, 마리아의 모태에서 잉태하심으로 탄생하신 것이 승리의 표적이었다. 나도 십자가의 길을 겸허히 따르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