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人生)은 ‘사람의 살아감’이다. 인간(人間)은 ‘사람의 사이’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행성과 행성 사이에는 만유인력이 있다고 뉴턴역학은 설명하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는 신용의 돈관계로 ‘신용의 힘’이 있다고 하고, 민주주의 사회는 정치역학으로 권력(權力)의 여론이 있다고 말한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길이 되신 주님’이 걸어가신다. (人生에서 生은 1년생 풀을 뜻한다)
풍요로움을 약속하며 시작된 산업혁명은 자본가의 독재로 귀결되었고, ‘빈익빈 부익부’의 불평등을 낳았다. 신분의 계급제도 대신에 경제적 계급제도가 우리를 군림하면서 자본주의는 돈의 노예생활을 강요한다. 빛과 빚은 동전의 양면처럼 인생을 고달프게 한다. 빛이신 주님을 보면서 살아야할 인생이 자본주의 권력에 예속되어 빚에 끌려 살아간다. 참 고달픈 인생들이다.
마태와 마가는 족보를 펼쳐놓고, 예수님을 통해 마귀로부터 노예해방이 되었음을 선언하였다. 족보는 곧 노비문서였으니, 아담이 죄에 갇힘으로 아담의 모든 후손은 죄의 감옥에 갇힌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채무를 탕감해주셨건만, 인생의 시간은 또 어디에 저당잡혀서 살아가는가. 알고보면, 짧은 하루요, 길지않은 인생인데, 바람처럼 허공을 맴도는 인생의 배회다.
언론인으로 살다보니,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본다. 들어보면, 모두 감옥에 살고있는 푸념들이다. 힘있는 자나 나약한 자나,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 고달픈 인생을 살아간다. 다양한 빚의 채무속에서 빛이신 주님을 고백하는 아름다운 찬양을 들을 수가 없어서, 나는 내게 물었다. “창훈아, 너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라고. 세상은 빚으로 채무자를 만들고, 주님은 빛으로 자유인을 만든다. 세상은 빌려주면서 족쇄를 채우고, 주님은 주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다. 이렇게 좋은 남편이신 주님을 어찌 외면하리요.
근접학을 정립한 홀(Hall) 박사는 친밀관계를 15~46cm로, 개인관계를 46cm~1.2m로, 사회간격을 1.2.~3.6m로, 공공간격을 3.6m로 규정했다. 나와 주님의 간격은 얼마나 친밀할까? 나의 사소함에 주님이 간섭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면, 편한 남자로서 주님이 느껴진다면, 주님이 남편(男便)이다. 남편은 편한 남편, 여편(女便)은 편한 여자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 내게 얼마나 편안한가? (홀박사의 친밀관계는 숨소리가 들리는 거리, 개인관계는 손이 닿는 거리, 사회관계는 말이 들리는 거리다.)